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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Dec 13. 2024

시비심과 유신견(有身見)

사흘간 혼자 집에 머물다 어제 딸네 다녀왔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혼자 있으면 소외감이 들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거북하다. 물론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 또한 시간이 너무 늘어지면 불편하다. 시간이 없을 때는 시간에 쫓기며 살다가, 시간이 너무 많아지면 시간에 치이며 산다. 하루 종일 혼자 집에 머물며 보내는 시간은 잘 활용하지 않으면 독이 된다. 그래서 오전 일과를 마친 후에는 밖으로 나가 세 시간 정도 걷는다. 시간에 치이며 살기 싫어 만들어 낸 방법이다. 참 까다로운 사람이다. 이것도 불편하고 저것도 불편하다. 법정 스님은 한 여름에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를 다듬으셨다고 한다. 오랜 시간 수행을 해오신 스님께서도 신독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방편을 쓰셨다. 어쩌면 나의 이런 태도도 그다지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제 한 친구가 카톡으로 자신의 전생이 암행어사였다며 ‘내 전생 모습 보기’ 어플을 보내왔다. 심심풀이 삼아 나도 해봤다. 나의 전생은 ‘대쪽 선비’. 그리고 밑에 “혹시 지금도 논리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물론 재미 삼아 보는 것이지만, ’ 시시비비‘라는 말이 걸렸다. 시비를 가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남 앞에서만 시비를 피할 뿐이다. 굳이 논쟁을 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또한 논쟁을 해서 이길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생각과 다르면 속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한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좋고 나쁨을 구별한다. 그것도 그 당시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혼자 있으면 편안하지만, 외롭거나 소외감을 느끼는 불편함도 이와 같은 상황이다. 시비를 따지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늘 시비를 따지며 살고 있다. 단지 다른 사람 앞에서만 하지 않을 뿐이다.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고통 끝 행복 시작일 텐데, 이 일이 참 어렵다.      


나’라는 유신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비를 따진다. 유신견은  몸을 지닌 자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견해다. ‘나’가 있기에 시비가 발생한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상대방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나를 대한다. 그러니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시비심은 차별심이다. 차별심은 상대개념을 만들어낸다. 상대개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갈등을 만들어낸다. 만약 ‘나’가 없다면 ‘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없다면 시비도 사라지고 따라서 모든 갈등과 고통도 사라진다. 모든 고통의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나’가 무엇인지, 또는 ‘나’는 누구인지 모르고 한평생 살아간다. 자신의 몸과 생각, 재산과 명예, 권력과 권위를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표현하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껍데기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허수아비가 완장을 찬 모습이다. 완장의 주인은 없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완장 역시 허상이다. 완장은 화롯불에 떨어지는 눈송이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완장을 차기 위해, 그리고 그 완장이 자신이라는 착각을 하며 완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고 한평생 살아간다. 참 불쌍한 중생이다.      


동안거 기간 동안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나’가 있다는 유신견을 제거하며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법이다. 즉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고, ‘나’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 모든 존재나 법은 무상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행방법이다. 이 진리를 확인하고 체득하기 위해 수행을 한다. 수행은 쉬운 방법부터 진행된다. 물질인 몸과 정신인 마음이 한 쌍으로 움직이는데 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며 ‘나’의 실체가 없음을 확인하는 공부법이다.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 하지만 마음이 없다면 볼 수가 없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물체라는 대상을 보되 마음이라는 것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나’라는 존재는 찾아볼 수도 없다. 눈, 대상, 마음 중 어느 것이 ‘나’인가. 눈은 물질이고, 대상은 그냥 존재하는 물건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정신작용이다. ‘나’라는 존재는 없고 단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빠사나는 몸의 작용부터 관찰하는 연습을 한다. 몸은 정신보다 알아차리기 쉽기 때문이다. 걸으며 걷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앉아서 들숨날숨에 따른 배의 부풂과 꺼짐을 관찰하고, 누워서 몸의 접촉 부분을 관찰한다. 식사를 할 때 식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수저를 들고 있는 감각을 알아차리고, 음식을 씹는 과정과 맛을 음미하고,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한다. 이런 연습 과정을 통해 ‘나’라는 존재는 없고 오직 물질인 신체와 정신인 마음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나의 소견이므로 틀릴 수도 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이 있다면 나의 글을 믿지 말고 직접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또 관련된 책을 통해 위빠사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길 바란다.      


아침에 30분간 세 단계로 걷는다.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며 걷는데 발을 들어 올릴 때 허벅지와 종아리 감각이 느껴진다. 발을 들고 내리는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한 발을 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한 다리는 떨리며 근육의 긴장이 느껴진다. 발을 들 때 허벅지 감각의 긴장감을 느끼고 내려놓을 때 발바닥의 폭신함을 느낀다. 들고 옮기고 놓는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동 시 발 주변에 바람이 느껴진다. 역시 중심을 잡기 위해 한 다리는 떨며 긴장한다. 오늘 특별히 많이 느낀 점은 한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이 수축되고 이완되는 것을 많이 관찰할 수 있었다. 좌선 시 손을 발 위에 올려놓는데 손의 팽창감이 느껴지면서 손과 발의 접촉점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손이 붕 떠있는 느낌이다. 배의 부풂과 꺼짐의 느낌도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배가 많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부푼다기보다는 긴장감을 더 많이 느낀 것 같다. 그러면서 몸 전제가 약간 부풀어 오르는 느낌도 받았다.     

 

수요일에 친구와 함께 영화를 봤다. 딸내미가 혼자 있는 아빠를 위해 보내 준 선물이다. 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편이다. 눈을 마주치면 딸의 고된 삶이 느껴져 눈물이 날 것 같아 일부러 피한다. 딸은 자신의 힘듦을 표현하지 않으려 밝은 모습을 보이지만, 나에게는 그 이면이 먼저 보인다. 그냥 마음으로 응원하고 해 줄 일을 하며 각자 역할을 하고 있다. 딸과 손자를 태우고 클리닉을 갈 때 오히려 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그것도 딸이 먼저 얘기를 꺼내면 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딸과 나는 서로 많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부녀는 말 대신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딸의 고됨을 느끼며 사위의 고됨도 느낀다. 두 손주들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부디 지금처럼 살길 바랄 뿐이다. 고됨 중간중간에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과 성장을 보며 동시에 행복도 느끼길 바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속 폭력적인 장면이 가끔 떠오른다. 특히 경행이나 좌선시 문득 떠오른다. 예전에 스님들께서 안거 기간 동안에는 영화를 보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본 영상은 그대로 저장된다. 그리고 뜬금없이 갑자기 영상이 떠오르며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한다. 요즘은 뉴스를 보면 머리가 아파 TV를 볼 때도 영화를 보는 편인데, 당분간 영화 보는 것을 멈춰야 할 것 같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영화가 공부를 방해한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알아차림의 대상인데, 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힘든데 게다가 다른 요소, 즉 영화라는 장면까지 가세하면 공부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안거기간 동안 반복해서 읽으며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공부를 점검하며 꾸준히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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