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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Apr 05. 2024

<금요 서울둘레길 마음챙김 걷기 9회차 후기>

  왜 명상을 하는가?

어제 올림픽 공원을 걸으며 만개한 벚꽃을 보았다. 그 꽃을 보며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무상(無常)이 떠올랐다. 곧 떨어질 잎을 생각한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오면 나목으로 변할 것이고, 다시 새 봄이 찾아오면 꽃을 피울 것이다. 무상이다. 무상은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유정, 무정은 시간이 지나며 변한다. 모습을 갖추고 머물다 모습이 변하며 사라진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다. 벚꽃에서 무상을 보니 벚꽃이 아름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쓰럽다.      


무상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붙잡거나 밀어내려 하니 세상사가 괴로움으로 가득하다. 무상은 고(苦)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변하는 모습은 실상이 없으니 무아(無我)다. 실상이 없는 것을 실상으로 착각하고 잡으려 하거나 밀어내려고 한다. 다시 괴로움이 시작된다. 무상은 무아이고 괴로움이다. 이 셋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습이 바로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오늘 서울 둘레길을 걸었다. 안양천에 벚꽃이 한창이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 사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벚꽃도, 사람도, 즐거운 추억도 무상이다. 지금 이 순간 꽃놀이에 빠져 무상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오히려 벚꽃이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란다. 꽃이 바람에 날려 꽃비를 내리면 꽃비를 보는 즐거움도 느끼며 동시에 잎이 지는 아쉬움도 느낀다. 십 년쯤 후에 오늘 안양천에 모인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노인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고, 어린아이는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고, 청년은 중년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의 노인은, 어린이는, 청년은 어디 갔을까? 지금의 청년과 미래의 중년은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우리의 몸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든 세포가 변한다고 한다. 세포가 모두 변한다면 그 몸이 우리 자신일까? 내 몸임에도 더 이상 내 몸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몸이다. 몸의 세포가 늙거나 변하는 것은 무상이고, 내 몸이면서 실상이 없기에 무아다. 그런 몸과 마음에 집착하고 흔들리며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오늘 걷기를 마친 후에 한 친구가 “왜 명상을 하는가?”라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순간을 잘 살기 위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뭔가 많이 아쉬운 답변이다. 그 친구는 과거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오늘 또는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딱히 괴롭고 힘든 일이 없다고 한다. 괴로움이 없는데 굳이 명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삶의 괴로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함이다. 괴롭지 않은 사람에게 과연 종교나 명상이 필요할까? 동시에 과연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지금 일순간 행복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마음이 상태는 변하지 않을까? 오랜 기간 늘 같은 행복감을 평생 유지할 수 있을까? 행복도 변하고 불행도 변한다. 무상이다. 따라서 무상은 절망의 단어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단어다. 행복이 변하니 절망이 될 수 있고, 불행도 변하니 희망이 된다.      


이제 그 질문에 나만의 답을 정리해 본다. 무상, 고,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이 세 가지 즉, 삼법인(三法印)을 확실하게 체득하게 되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아와 무상을 철견하면 탐욕이 사라진다. 자아가 없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섭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면 탐욕, 즉 탐착과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을 철견하면 불건전한 언행을 하지 않게 된다. 불건전한 언행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괴로울 일이 없다. 영원하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모두 어리석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즉 정견(正見)이 없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정견을 확립하는 것, 즉 무상, 고, 무아의 확고한 체득을 하기 위함이다. 


명상 공부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친구에게 ‘담마 코리아’를 추천했다. 몇 년 전에 이 센터에서 명상 수행을 직접 해 봤기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었다. 매우 안타까운 점은 국내 사찰이나 명상 센터를 추천하지 못한 점이다. 다녀 본 곳도 몇 곳 안 되기에 추천할 수도 없었고, 직접 수행을 해 보지 않았기에 더욱 추천할 수가 없었다. ‘담마 코리아’를 추천한 이유는 바로 오랜 기간 구조화된 수행 방법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호흡명상과 위빠사나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수행을 지도해 주기 때문이다. 명상은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다. 그것도 처음부터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담마 코리아’의 수행 체계와 방법은 개인적으로 매우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언젠가 인연이 되어 ‘담마 코리아’에서 수행하기를 기원해 본다. 명상을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 그 친구가 지금 매우 행복하다는 점은 축복받을 일이다. 그만큼 잘 살아왔다는 것이고, 지금 행복하고, 삶의 어떤 장애도 없다는 것이다.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그가 그만큼 노력을 했기에 그런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행복하기를 바라며, 동시에 언젠가는 명상 수행을 통해 삶의 어떤 굴곡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아가길 기원한다.      


길을 걸으며 길동무가 스승이 되고,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상황이 스승이 된다. 만개한 꽃이 스승이 된다. 만개한 꽃을 보며 무상을 관찰한다. 삼라만상이 스승이라는 말씀은 진리다. 다만 그 사실을 얼마만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철견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길동무들과 길을 걷고, 차를 마시며 나눈 정겨운 대화가 마음공부를 익게 만들어준다. 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배우고, 길동무를 통해서 배우고, 대화를 나누며 배우고, 스스로 성찰하며 익혀간다. 마음공부는 ‘설익은 것 익게 하고, 익은 것 설익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길들여진 삶의 모습에서 탈피하는 것이 마음공부다. 그리고 이것이 야생성의 회복이다.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이 마음공부고 수행이다. 선과 악이 또 삶의 굴곡이 단지 바다에 이는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견하고, 깊은 바다는 여전히 늘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철견하는 것이 견성이고 깨달음이다. 물거품을 버리고 심해를 만나야 한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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