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주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꽃이 되었다.
“올해 수고한 자신한테 선물하고 싶은 거 없어요?”
롯데백화점 1층 편집숍에서 골든구스 270 신발을 신어본 후 둘러보고 올게요 하면서 남편이 물어본다.
“없어요.”
명품가방 없어 명품신발 없어 화려한 명품 의류 나는 정말 없어
없을 것까지야. 관심이 없는 것뿐이죠. 입고 나갈 곳이 없거든요.
재택근무자는 한 달 내내 한 가지 밑단 짧은 청바지만 입는다. 하루 7시간, 한 달 20일 기준 140시간 동일한 자세로 앉아있다. 샤워하려고 청바지를 벗어놓으면 D컵 사이즈 가슴만 한 무릎이 튀어나와 있다. 뒤돌아서면 살아서 움직일 태세다. 상체는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인데 무릎만 튀어나온 현실이여.
매의 눈으로 백화점 1층 매장을 스캔한다. 손에는 10만 원짜리 상품권 3장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얘네들은 푸드코트에서 임무를 다 할 것이다.
컴온 베이비. 매대에 꽂혀있는 쨍한 오렌지색 립스틱이 부르니 홀린 듯이 따라가지. 파프리카? 핫 파프리카! 눈치 볼 겨를도 없이 들어 올린다. 코로나 전에 발랐던 슈에무라 강남오렌지가 떠오른다. 그렇지 그 색이야.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거기에 스카프 하나만 걸치면 엄정화 여기 있소이다.
매니저가 너무 쨍하다며 단독으로 바르면 어려운 색이라 말린다. 톤 다운 색이 있다며 손 등에 발색해서 보여주는데 반응이 뜨뜨 미지근하다. 그 색은 엄정화가 아니에요. 핫 파프리카가 어울린다고 말해주세요. 그녀의 반응을 재빠르게 캐치한 매니저는 바탕색을 바르고 입술 안에 포인트로 바르면 너무 예쁘죠. 안으로 들어오시면 발라드릴게요.
백 번을 지나다녀도 립스틱 한 번 발라주지 않던 타 매장과는 달리 화장을 해주겠다니. 그 말에 이미 활짝 열린 마음과 더불어 지갑도 열린다. 뭐든 권해주세요. 예쁘다고 해주세요. 오늘 맘먹고 돈 쓰러 나왔어요.
까만 스툴에 앉는다. 화려한 조명이 그녀를 감싸고, 그 순간 눈썹 반만 존재하던 재택근무자에서 뮤지컬 무대 뒤의 주인공이 된다. 동공에 비친 반짝이는 조명 속 그녀의 얼굴이 조막만 하다. 재빠르게 매니저는 일회용 팁에 톤 다운된 베이스 컬러를 묻힌 후, 입술 전체에 도포한다. 아 하고 벌려보세요. 핫 파프리카가 드디어 입술 가운데에 닿는다. 암 소 핫핫핫. 난 너무 예뻐요. 암 소 파인. 난 너무 매력 있어. 암 소 쿨. 난 너무 멋져.
슬쩍 건네받은 거울 속. 한소희 보다 예쁘다 내 입술이. 쭈굴쭈굴 착색된 거무튀튀한 입술은 이제 없다. 잠깐.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눈썹 좀 봐드려도 될까요. 어떻게 알았지? 오늘 눈썹이 제일 별로였거든. 오른쪽 광대 위에 애교점 일부러 찍고 온 거 혹시 눈치챘을라나.
슥슥 입술을 지웠던 화장솜으로 눈썹을 지우니 모나리자가 저기 있네. 그녀는 거침없이 눈썹 아래에 선을 그리고 나서 눈썹 끝에 삼각형을 그린다. 이런 참신한 방법은 이사배도, 유투르도 안 가르쳐줬는데. 여기 눈썹산이 보이죠. 이걸 기준으로 눈썹 앞쪽까지 채워준다고 생각하세요. 눈썹만 바꿔줘도 인상이 또렷해 보이거든요.
네. 언니. 매니저 언니. 저보다 메이크업 잘하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이거 작년 4월에 거금 18만 원 주고서 문신한 거거든요. 그런데 요 모양이에요. 속상해 죽겠어요. 그리고 마스카라 같은 걸 꺼내더니 눈썹 앞머리에 발라준다. 갈색 아이브로우 안에서 숭하게 까맸던 털이 갈색이 됐다. 어머. 순식간에 세련된 갈매기가 이마 아래에 앉아있다.
눈썹을 지금보다 조금 더 두껍게 그린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어떠세요.
말해 뭐해요. 지금 안 보여요. 사랑에 빠진 입꼬리.
그리고 블러셔 지금 잘하셨는데, 광대까지 바르지 마시고 눈동자 아래정도만 터치해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웃어보세요. 톡톡톡.
하하핫. 스펀지에 블러셔 잔뜩 묻혀서 왼쪽에 3번, 오른쪽에 3번 광대 저 끝까지 바른 거 티 나나요.
섀도우는 어두운 톤으로 하셨네요.
사실 집에 섀도우가 없어서 브로우칼라 눈두덩이에 손으로 얹은 거예요.
제가 라이트 한 톤으로 깔아드리고, 펄로 포인트 넣어드릴게요. 위를 보세요.
브러시가 쌍꺼풀에 닿을 때 간지럽다. 꺄르르르르르. 밤하늘에 펄 better than your 루이비통 your 루이비통
지금 해주신 거 다 주세요. 브로우, 새도우, 펄, 톤업 밤, 모두 다요. 아니다. 잠시만요. 아바타 영화표 끊어야 하니까 립스틱은 다음에 살게요. 핫 파프리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렇게 상품권 2장과 함께 호로록 날아간다.
Photo by Önder Örtel on Unsplash
Photo by Наталья Кленова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