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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Sep 16. 2020

누가 전화 벨소리를 세 번이나 울리게 하였어

에세이 드라이브 6기 - 키워드: 벨소리

(2020.05.25)


입사 후 모든 교육을 마치고 처음으로 팀 배치를 받았던 날이었다. 아니 그다음 날이었나. 기억 속에서 그즈음의 시간은 모두 뭉뚱그려졌으므로 하여간 처음 며칠 안 되었을 때다. 과장님과 대리님 사이에 끼여있는 자리는 아직 내 자리 같지가 않았다. 앉을 때마다 '실례합니다' 하고 앉아야 할 것 같은 그 생경함. 새 것인 모니터도 키보드도 마우스도 다 그랬다. 요상한 민트색의 파티션 안에 갇혀 나는 자리를 잘못 찾은 애처럼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제일 바쁠 때 왔다'고 대리님은 그랬다. 내 사수였는데, 말마따나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바빠 보였다. 출근 후 팀장님부터 순서대로 인사를 다 돌고 자리에 앉기 전 마지막으로 사수에게 인사를 했는데 대부분은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참 바빠 보였었다. 그 철벽 같은 바쁨을 뚫고 나는 도와드릴 거 없냐고 몇 번 물었다. 그렇게 하라고 다른 자리에 앉은 선배들이 귀띔을 해준 덕이다. 대리님은 내 도움의 손길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일은 천천히 넘겨줄 테니 일단 공용 폴더에 있는 보고서와 서류들부터 읽으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감부터 잡으라고. 그래서 처음 며칠간 나는 정말 많은 보고서를 읽었다.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저녁 일곱 시 반까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글자의 수는 참으로 많다. 다 이해했다고는 못 하겠으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매년도 계획보고서니 결과보고서니 하여간 수도 없는 보고서를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 며칠 중 하루다. 오늘도 열심히 뚠뚠 보고서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같은 팀이지만 다른 그룹인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소화야!' 하는 목소리가 꽤나 커서 나는 벌떡 일어섰다. 저 끝 쪽에 앉은 과장님을 향해 '네?'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과장님은 나를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저 사람이 부른 게 아니었나.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머뭇머뭇 그쪽으로 다가섰다. '과장님, 저 부르셨...' 말이 끝나기 전에 과장님이 옆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전화받으라고 인마, 전화.' 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과장님이 나를 부르고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빈자리의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있었음을. 자리에 누가 없는데 전화가 온다면 그 모든 건 막내가 '땡겨' 받아야 함을, 전화벨이 한 번 울렸을 때 공석 여부를 확인하고 전화벨이 두 번 울렸을 때 바로 땡겨 받아서, 절대 전화벨이 세 번 울리지는 않게 해야 함을.


아무도 나에게 전화를 땡겨 받아야 한다고 일러준 적은 없다. 사수인 대리님은 바빴다. 그렇지만 막내로서 그런 것들을 잘 캐치하는 게 눈치이자 센스인 것이다. 그걸 왜 몰랐을까. 별 걸 다 가지고 나는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다음 전화는 놓치지 않을 요량으로 그 날 하루 종일 두 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다행히 그다음 건 누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 미리 캐치는 했는데, 대체 뭘 눌러야 전화가 땡겨지는지 몰라 아무거나 막 눌러보다가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그쪽 자리로 뛰어가 받았다. 알고 보니 구획이 교묘해서 거기는 우리 팀이 아니고 옆 팀이었다. 그 우스운 꼴을 본 옆팀 선배가 메신저로 쪽지를 보내줬다. 소화 씨, 우물정자 누르면 땡겨져요. 근데 자기 팀꺼 아니면 안 땡겨져요.


그 뒤로도 고생길이 길었다. 하필이면 나는 참 소리에 둔감하다. 뭐에 집중해 있으면 애초에 벨소리 같은 걸 잘 듣지도 못한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해서는 엑셀을 뒤지고 있으면 벨소리는 귀 옆을 스쳐간다. 그러면 다시 '소화야!’ 하고 이름이 불린다. 가끔은 팀장님이 불렀고 과장님도 불렀고 옆에 있는 대리님도 불렀다. 자기 옆자리에서 벨이 울려도 절대 땡겨 받지 않고 나를 불렀다. 그건 내 일이었으니까.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았다. 전화받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그냥 이름만 부른다. 나는 또 멍청이 같이 정말 내가 필요해서 불렀나 싶어 '네?'하고 일어섰다가, 그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는 걸 깨달으면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왜 이렇게 전화 벨소리가 안 들릴까. 바쁨이 조금 가신 사수 대리님은 대놓고 얘기한 적도 있다.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니 왜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나, 벨소리 시끄러운데. 안 들리나? 저게 안 들려?


노이로제에 걸렸던 것 같다. 사무실이 조용하다 보니 그렇게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다른 팀에서도 흘끔흘끔, 뭔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전화 땡겨 받는 걸 싫어해서 일부러 안 하려고 한다는 뒷담화도 흘러 흘러 다시 내게 왔다. 어떤 오해도 받기 싫어서 나는 점점 더 귀의 모든 신경을 단단히 세웠다. 세 번 울리게 하긴커녕, 전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처음엔 이게 어느 자리로 온 전환지 구분도 안 가고 그게 우리 팀인지 남의 팀인지는 더더욱 몰라서 일단은 무조건 집어 들고 우물정자를 눌렀다. 그렇게 여러 번, 엄연히 자리에 있는 선배의 전화를 내가 땡겨 받기도 했다. 급해서 그랬다. 다른 팀이면 그나마 안 땡겨지니 다행이지. 전속력으로 땡겨 받았는데 저쪽에서 과장님이 내 전화라며 손짓 발짓을 하면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곤 했다.


매일 쉬이 피곤해졌다. 잘 쓰지 않던 귀를 쓰느라, 없던 근육을 만드느라 그랬나 보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누구야, 누가 전화 벨소리를 세 번이나 울리게 하였어. 궁예 같이 엄중한 눈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참 열심이었다. 다행히 근육이란 계속 쓰다 보면 잡히기 마련이라 갈수록 놓치는 전화가 줄었다. 미묘한 거리감으로 이게 누구 자리로 온 전화인지도 구별하게 되었다. 한 번 반은 울리게 두되, 그때까지 안 받으면 두 번째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바로 전화를 땡겨받게 되었다. 너무 급하거나 초조해 보이지는 않는 모양으로,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조금 더 짬이 차면서는 의식조차 안 하고 그 모든 게 가능해졌고.


이직한 회사에는 내선전화가 없다. 3년 수련하여 경지에 다다른 전화 땡겨 받기의 기술을, 나는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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