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값이라던 딸기 가격이 많이 내렸다. 마켓컬리에서 추가로 세일까지 하기에 냉큼 한 팩 더 주문했는데 맛이 없다. 퉤퉤 맛없단 건 아니고 그냥 느껴지는 맛이 아예 없다. 향도 맛도 없이 싱거운 물 딸기. 딸기의 계절이 또 끝나가는 모양이다.
내 최애 과일은 늘 딸기였다. 유치원 다닐 땐 밤마다 딸기우유를 먹고 이도 안 닦고 잠드는 바람에 이가 다 썩었다고 했다. 이제 딸기우유는 좋아하지 않으므로 좀 의심스러운 얘기지만,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손발이 묶여 신경치료를 ‘당했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니 나름 진실성이 있다. 배스킨라빈스에서도 베리베리스트로베리만 먹었다. 외길 걷는 수행자처럼 새로운 맛이 나오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딸기가 단순히 좋아하는 과일을 넘어 최애에 등극한 순간은 생생하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다녔던 날인데 한 열두 살쯤 되었었나. 엄마, 나 약간 몸이 으슬으슬해, 감기 오려나 봐. 기억대로 열두 살이었다면 그렇게 적확하게 내 몸상태를 인식하고 표현했을 리 없다만, 하여간 오고 간 대화 속에 ‘나는 곧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러자마자 엄마는 과일 트럭에서 딸기를 한 팩 샀다.
그럴 땐 딸기를 먹어야 돼. 비타민, 비타민.
비타민이 딸기에만 있는 것도 아닐진대 엄마가 왜 그렇게 확신에 차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야 뭐 원래도 딸기를 좋아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었고. 그날 트럭에서 사 온 딸기는 유난히 달았다. 나는 욕심을 부렸고 한 접시를 혼자 끌어안고 거진 다 해치웠다. 맛있어. 그리고 감기몸살에 걸리기 직전이었던 내 몸이 기분 좋게 가벼워졌다. 세상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감기 기운이 언제 왔었냐는 듯 개운했다. 세상에.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거였을까? 엄마가 딸기를 먹으면 감기가 나을 거라고, 자기 스스로도 별로 안 믿는 얘기를 그날따라 너무 확신에 차서 말한 걸까? 뭐가 됐든 그날 내가 느낀 것들은 감각의 영역이고, 스무 해 가까이가 지난 지금도 그날의 그 과일 트럭에서 딸기를 사던 장면이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 나는 딸기의 약효(?)를 맹신했다. 엄마 나 피곤해, 딸기 사줘. 감기 올 것 같으니 딸기 먹을래. 강한 믿음은 감기 정돈 치료하는 법이라. 경험은 쌓였고 믿음은 강해졌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하향 곡선을 그린다 싶으면 바로 딸기를 처방했다. 딸기 철이 아닐 때는 딸기주스를 달고 살았고 냉동딸기를 사다 쟁여놓고 갈아먹기도 했다. 기운이 제일 모자라던 고3 때 우리 엄마는 매번 풀무원 딸기주스와 스무디킹의 스트로베리 익스트림을 사다 나르느라 바빴다. 그 당시엔 내 피의 팔 할이 딸기주스였으려니. 에너지 포션이라도 되는 양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처럼 딸기가 갈급하지 않은 건 그러니까 적어도 그때처럼 몸이 축나진 않는단 소리도 된다. 물론 그럼에도 내 지독한 사랑은 여전해서, 엄마는 그 해 첫 딸기가 마트에 등장하면 바로 한 팩을 집어온다. 첫 수확한 딸기는 맛에 비해 꽤 비싼 편인데도 불구하고. 본격 딸기 철이 되면 냉장고에 딸기가 끊기는 법이 없고. 마켓컬리든 뭐든 내가 종종 따로 장을 보는 일이 생긴 뒤로는 냉장고에 두 팩의 딸기가 들어차기도 한다. 엄마가 사 온 것과 내가 사 온 것. 딸기주스도 두어 개. 냉동실엔 냉동딸기.
이번 딸기의 계절은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는 시기와 겹쳐서 오랜만에 또 집착적으로 딸기를 찾았다. 똑 떨어지는 일이 생길까 봐 한 팩이 다 비기 전에 새로 사 왔고 급할 땐 새벽 배송도 이용했다. 매일 출근하기 전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에 그 무엇보다 딸기를 많이 넣은 보울을 들고 우걱우걱 의식처럼 아침을 먹었다. 질리는 법도 없지 딸기는. 늦잠을 자서 그걸 못 먹고 나선 날에는 어째 몸에 기력이 없고. 요거트가 안 보일 정도로 딸기를 가득 넣어야 좋다.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순이에게도 두어 조각 나눠줘야 하니 그것까지 계산해서.
이직한 지 두 달. 슬슬 적응이 되려는 참이지만 아직은 딸기가 필요한데, 계절이 벌써 끝나간다. 단맛과 향이 사라진 끝물 딸기를 먹으며 요즘따라 유독 날아가는 것 같은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딸기의 계절은 왜 이다지도 짧은가. 그러나 시간은 계속 날아가고 있으므로, 다음 딸기의 계절도 순식간에 도래할 것이다. 시간이 날아가는 것이 슬프고도 기쁘다. 인생사 새옹지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