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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식 Apr 23. 2024

스마일 오키도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다. 아이가 늦게 잤고 그래서 약을 늦게 먹었고 새벽에 아이가 건너와서 내 옆에 누운 뒤로는 조금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약을 먹은 뒤로는 처음 겪는 불면.


선잠에 들어 있는 모든 순간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머리는 무겁고 이불은 차가웠고 잠을 자면서도 잠에 빠져들려고 노력하느라 기운이 빠졌다. 불쾌해져서 결국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6:27 알람이 울리려면 52분이나 남았다.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귀중한 시간. 다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가실 만큼 잠깐이라도 깊게 자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너무 깊게 잠들면 알람을 못 들을까 걱정하다 잠에 들었다.


7:19 알람이 울려 잠에서 깼다. 여전히 피곤하고 불쾌한 채였다. 영어 교육 방송을 켜고 노트를 펴고 펜을 들었다. 수업을 듣는 내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다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년째 하는 영어 공분데 영어는 왜 이렇게 안 늘어?! 하는 자괴감도 얹어졌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영어 수업을 열심히 받아 적다가 도대체 날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하는 원인이 뭔지 대체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휘두르는지 알고 싶어서 시간을 되짚어 봤다. 내가 처음 기분이 상한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4시간 전 대략 새벽 3시 반: 아이가 화장실에 갔다가 내 옆으로 와서 눕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자고 있는데도 피곤하다. 자면서도 육아하는 기분. 도대체 몇 살이 되면 온전히 혼자 자는 걸까.      


6시간 전: 잘 준비 마치고 소등. 이상하다. 약을 먹었는데 왜 잠이 안 오지?     


23:30 아이가 드디어 자러 들어감. 한 시간이나 늦게 자서 22:30에 시작하는 최강야구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났나. 아니다. 다시 보기로 보면 된다. 하지만 늦게 자는 것 자체로 좀 피곤이 쌓이긴 하지.     


22:00 글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아이를 봤는데 연필도 내려놓고 장난에 빠져있다. 평소라면 5분 만에 끝나는 문제집 한 장인데 30분째 붙잡고 있다니. 그래서 화가 났나. 맞다. 하지만 이게 처음은 아니다.     


17:20 수영장에 가려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양말을 벗던 아이가,     

“엄마, 나 오늘 실내화 주머니를 까먹고 안 가져가서 화장실에 맨발로 들어갔다가 양말이 엄청 더러워졌어.”라고 했다.     


아, 찾았다. 내가 화가 난 이유.     


“실내화 안 가져가면 교실에서 맨발로 생활해?”

“응. 근데 화장실 갈 때는 신발 신고 가는데 내가 양말만 신고 있는 걸 까먹고 그냥 들어갔어.”     


맨발인 걸 까먹고 화장실에 갈 정도였으면 맨발이 썩 불편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나 보다. 예민한 아이가 아니라 참 다행이다. 그런데 그 더러운 양말로 다시 신발을 신었네? 그리고 집에 와서도 바로 안 벗고 온 집안을 걸어 다니다가 학원도 하나 다녀오고 수영복 입으려고 이제야 벗는구나. 화장실에 있던 (아마도 매우 더러울) 물을 밟은 양말로. 게다가 그거 새 양말. 그것도 흰 양말.      


오늘 아침에 체육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더러워질 일 없겠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학교 갈 땐 좀 찜찜하지만 별일이야 있겠어, 하면서 꺼낸 새 양말. 스마일 얼굴 아래 오키도키라고 삐뚤빼뚤 레터링이 들어간 귀여운 양말.     


언제나 내 예상 밖의 일을 벌이고야 마는 내 아들 최고다 진짜 하는 생각 하며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 표정을 가만히 보던 아이가, 양말은 내가 손빨래할게.라고, 한다. 그래 네가 해.라고 하고 입을 꾹 닫았다.     

아이가 수영장에 가면서 엄마 이따 끝날 때 데리러 오면 안 돼? 하는데,

응, 안돼. 혼자 올 수 있잖아.라고 하며 현관문을 꾹 닫고 뒤를 돌았다.     

거실 한가운데에 스마일 오키도키 양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 내가 화가 난 이유가 양말이 더러워져서인지 내가 양말이 더러워질 수 있다는 걸 알고도 신겨 보내서인지 아이가 더러운 양말을 하루 종일 신고 다녀서인지 모르겠다. 물론 실내화 주머니를 잘 챙겨 갔으면 좋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열이 뻗쳐서 살겠냐고.     


양말은 언젠가는 더러워질 테고 나는 양말이 더러워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신겨 보냈고 아이는 더러운 양말이 불편하지 않아서 온종일 신고 다녔다. 그것뿐이다.     


20분의 영어 수업이 끝났다. 몸을 돌려 아이를 꼭 안았다.      

달걀비빔밥을 먹여 학교에 보내고 양말에 찌든 때 세정제를 뿌려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그래, 스마일 오키도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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