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물, 그리고 잊혀진 역사
우버를 하면서 와히아와(Wahiawa) 길을 지나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주로 관광객들은 와이키키에서 차를 렌트해서 노스쇼어를 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가끔은 우버를 타고 이곳까지 가는 고객을 만날 때면 나도 감사히 차창 밖의 풍경을 흠뻑 느낄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어린 여자 아이 두명과 함께 가족 손님이 탔다. 귀여운 아이들의 가방엔 파인애플옷을 입은 헬로키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벌써 두번째 방문이라며 들떠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한적한 2차선 도로를 달리며 창밖에 펼쳐지는 초록빛 파인애플 밭이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햇살을 머금은 평원은 한눈에 보기엔 평화롭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침묵 속에 묵직한 시간이 쌓여 있는 듯하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풍경이,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관광객의 기억 속 파인애플은 달콤한 열대의 상징이지만, 길 위에서 바라본 파인애플 밭은 그 이면의 이야기를 불러왔다.
파인애플, 그리고 그 이전의 이야기
이 밭의 시작은 사실 파인애플이 아니었다. 한참 전, 19세기 중반에는 사탕수수가 이 섬을 지배했다.
그 시절, 중국과 일본, 필리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낯선 땅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노동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들의 땀이 모여 하와이 농업의 바탕을 이루었다.
그 흐름 속에서 1901년, 제임스 돌이 와히아와에 파인애플 농장을 세웠다. 그때부터 하와이는 ‘파인애플 왕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통조림에 담겨 전 세계로 실려 나간 파인애플은 ‘하와이’라는 브랜드와 하나가 되었고, 달콤함은 곧 이 섬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하지만 풍경이 늘 그렇듯, 겉으로만 보면 놓치기 쉬운 면이 있다. 누군가의 성공 이야기가 들릴 때, 그 뒤에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있다는 것.
침묵 속의 물길
파인애플을 대규모로 재배하려면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했다. 기업들은 산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터널과 수로를 만들었고, 그렇게 오아후의 물길은 인공적으로 재편되었다. 문제는 그 물이 원래 하와이 원주민들의 타로(kalo) 농사, 즉 로이(lo‘i)라는 전통적 관개 시스템을 통해 사용되던 물이었다는 점이다. 하와이 원주민에게 물, 즉 Wai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생명이고 신성한 존재였다. 수로가 바뀌면서 전통 농지는 메말랐고,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문화도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지금도 이 밭의 침묵 속에 스며 있는 듯하다.
왕국의 쇠퇴, 그리고 새로운 얼굴
시간은 또 흐르고, 1970년대에 접어들자 파인애플 산업은 내리막을 걸었다. 높은 인건비와 토지 비용은 기업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생산지는 값싼 노동력을 가진 나라들로 옮겨 갔다. 섬을 가득 메웠던 파인애플 밭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고, 경제의 무게 중심은 관광업으로 이동했다.
돌 푸드 컴퍼니도 더 이상 이 땅에서 파인애플을 대규모로 키우지 않는다. 대신 와히아와의 옛 농장은 ‘돌 플랜테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해,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기차가 지나간 자리
지금 돌 플랜테이션은 신혼부부나 가족 여행객이 즐겨 찾는다.
파인애플 미로, 기념품 가게, 기차 체험, 아이스크림.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열대의 낭만과 달콤함을 만끽한다.
하지만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릴 때면, 이 길이 애초에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한때 이 철로 위를 달리던 것은 바구니 가득 파인애플을 실은 노동자들의 손수레와 기차였고, 그 뒤에는 수많은 이들의 땀과 하루가 실려 있었다.
물길의 주인이 바뀌나
최근 하와이 주정부는 돌 푸드 컴퍼니가 오랫동안 관리해 온 와히아와 수로 및 댐 시스템에 대해 유지 관리 미비를 이유로 벌금을 부과해 왔다. 이 수로는 플랜테이션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노후 인프라였고, 안전 문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결국 2024년, 하와이 주정부는 해당 수로 시스템을 공공 인프라로 인수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지역 농업의 생명줄을 다시 공공의 책임 아래 두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물길의 소유가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물을 따라 살아가는 지역 농부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소비되는 파인애플
이제 파인애플은 하와이의 대표 수출품이라기보다, ‘하와이적인 것’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소비된다.스타벅스 한정판 텀블러, 기념품 가게 속 파인애플 장식, 그리고 수많은 사진 속 배경.
파인애플은 먹는 과일이기보다, 기념되는 이미지이자 팔리는 상징이 되었다.
풍경 너머의 이야기
오늘도 나는 손님을 태우고 공항으로 향한다. 그들의 기억 속 하와이는 아마 푸른 바다와 햇살, 그리고 달콤한 파인애플로 가득할 것이다. 그것이 틀린 건 아니다. 하와이는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니까. 다만 그 풍경 아래에 흐르는 또 다른 이야기도 함께 떠올려주면 좋겠다.
언제나 보이진 않지만, 이 밭의 침묵 속에는 여전히 그 흔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조용한 이야기를 이 길을 달리며 누군가와 나누는 것.
그것이 내가 계속 운전석에 앉아 이 기록을 이어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