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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황돼지 Jul 01. 2024

아이돌 라이브의 새로운 기준

- 최종결론

목소리가 AR을 뚫고 나왔어! 라이브 맞잖아!

 AR이란 CD, 테이프, MP3, 즉 음원 재생을 의미하는 용어로써 립싱크를 할 때 틀어 놓는 그것이다. 과거 립싱크는 입모양과 숨소리로 누구나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이브 AR이 등장하며 구별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라이브 AR이란 숨소리와 애드립을 따로 녹음해 둔 음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과장 섞인 가정을 해보자면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10회 정도 녹음을 하고 가장 잘 부른 것을 골라서 AR로 쓰는 것이다.


 라이브 AR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변화를 주었다. 마이크를 ON으로 두기 시작한 것이다. 더블링 효과의 이점을 챙기면서 립싱크 문제까지 털어낸 신의 한 수. 이러한 구조는 절대음감도 파악할 수 없다. 두 소리를 구별할 수 있더라도 어느 쪽이 라이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AR을 뚫고 나왔다!" 라이브 AR보다 실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는 소리다.


**더블링 - 똑같은 구간을 두 번 이상 녹음하여 사운드를 더 밀도 있게 만들어 불안정을 해소하는 기법. 음악을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면 더 잘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도 더블링 효과의 일종이다.


관객은 AR(하늘색)과 라이브(빨간색)를 더블링으로 듣게 된다.



선택적 라이브

 더블링으로 립싱크 논란을 회피하겠다는 발상도 문제지만 오만가지 편법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AR을 더블링으로 녹음해 버리면 목소리가 3~4개로 나갈 수도 있으며, 부르기 어려운 구간은 립싱크를 하고 쉬운 구간만 라이브를 하여도 눈치챌 수가 없다. 중간중간 호응을 유도하는 멘트를 날려주면 그 아티스트는 라이브를 해도 립싱크고 립싱크를 해도 라이브가 되는 지경에 이른다.


 목소리가 AR을 뚫고 나오면 라이브의 증거는 되겠지만 다른 구간에서 립싱크를 했다는 증거도 된다. 다르게 해석하면 성량과 음정 박자가 불안해서 '뚫고 나온 것'처럼 들리는 셈이다. AR 볼륨이 60%이고 라이브 볼륨이 40%라면 립싱크일까?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관객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이다. 내부고발이 아니라면 구별할 수가 없다.



저스틴 비버도 하는데?

 AR을 까는 행위는 댄스가수에게 부여된 일종의 어드벤티지였다. 따라서 AR의 볼륨은 작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티스트가 관객석에 마이크를 돌렸을 때 미세하게 들리는 음원 소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아티스트도 알고 관객도 아는 것이며 '라이브'로 분류된다. 만약 관객석을 향해 마이크를 돌렸는데 AR의 볼륨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면 서로가 민망하지 않을까?


 앞서 언급했듯 KPOP은 AR을 따로 제작하고 볼륨도 크다. 일반적인 기준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다. AR 0% 음악축제에 KPOP 아티스트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다. 어떻게 보면 르세라핌이 코첼라에서 그 사단을 일으킨 것은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나 싶다. 서구에서 KPOP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서브컬처 무시와 인종차별 탓만은 아니다. 자신이 응원하는 KPOP그룹을 지금 당장 코첼라 무대 한가운데로 던져 놓는다고 상상해 보자. 불안하지 않은 팬들은 소수일 것이다.



이상한 올려치기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나는 블로그 시절부터 아이돌 라이브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을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 왔다. 왜냐하면 라이브를 고집하면 손해 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라이브든 립싱크든 누구도 알아챌 수 없다면, 그 뒤는 뻔한 결말이다. 간혹 라이브를 고집하겠다는 그룹은 가창력이 부족한 그룹으로 전락하고 그게 아니어도 무대마다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교묘하게 AR을 섞는 그룹은 실력이 낮더라도 더 많은 찬사를 누리며 리스크도 없다. 자신이 기획사 사장이라고 가정하고 선택지를 상상해 본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 르세라핌의 코첼라 라이브 실력 논란이 터졌다. 대중들 사이에서 KPOP 아이돌의 라이브 행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르세라핌을 필두로 아이브, 뉴진스를 포함해 많은 그룹이 지적되었다. 비교적 실력이 좋다는 엔믹스, 베이비몬스터, 키스오브라이프 같은 그룹이 더 주목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오!! 모니터 앞의 나는 혁명이 도래한 것처럼 기뻐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르세라핌, 베이비몬스터, 엔믹스, 키스오브라이프


 이어서 민희진-하이브 사태가 불거졌다. 여론은 민희진의 압승이었고 팬들은 뉴진스를 지켜야 했다. 여기서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에스파 밟으실 수 있죠?" 에스파도 지켜야 했다. 에스파의 코첼라 영상 댓글을 확인하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면 하이브 사태 이전과 이후의 여론이 상당히 다르다. 비슷한 현상으로는 방시혁이 제작했던 걸그룹 글램이 있다. 그쪽의 댓글도 민희진 기자회견 날을 기준으로 평가가 180도 달라졌다. (글램은 '이병헌 50억 협박 사건'으로 화제가 되었던 그룹이라서 관련 댓글은 제외했다.)


글램 반응 (좌) 옛날, (우) 최근
에스파 코첼라 반응, (좌) 2년 전, (우) 최근


 나는 에스파를 실력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코로나 시절 잦은 립싱크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SM은 전통적으로 기본기가 탄탄했고 메인보컬은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에스파의 코첼라 여론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안티들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대중들의 높아진 눈높이 때문이었다. 오디션 프로와 음악 예능의 후보정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라이브란 원래 깔끔하지 않다는 상식을 망각한 듯 보였다. 에스파가 다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에스파가 제자리를 찾게 된 핵심은 대중들이 자신들의 실책을 깨우친 덕도 있지만 '반 르세라핌' 심리도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이브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아일릿도 가창력 논란이 확산되자 <르세리핌+아일릿>의 과녁은 무한대로 커져만 갔다. "르세라핌, 아일릿 보다만 잘하면 된다.", "가창력 부족해도 1인분만 하면 된다." 르세라핌의 코첼라 논란 직후 가파르게 상승하던 '가수로서의 최소 기준'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다. 코첼라 논란과 하이브 사태 사이에 아이브의 컴백을 사냥개처럼 기다리던 여론이 상당했는데 민희진 기자회견 이후로 사냥개는 강아지가 되어버렸다. 아이브가 노력도 많이 하고 라이브 비중을 늘렸다고 하더라도 경쟁 팬덤의 견제까지 사그라들었다. 여론의 구도가 <르세라핌+아일릿 VS 모두>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아이브를 가창력으로 지적하면 이어서 컴백하는 뉴진스를 지키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뉴진스가 아이브보다 월등한 가창력을 갖고 있진 않아서다.


 요즘 아이돌 영상 댓글을 둘러보면 이상한 올려치기가 많다. "르세라핌 보단 낫다 ㅋㅋㅋㅋ", "보고 있나. 하이브? 이 정도라도 해야지!" 문제가 뭐냐 하면 해당 댓글이 달린 영상 속 아이돌의 실력은 고만고만하다는 점이다. 코첼라 논란 이전이었다면 악플이 달렸을 수도 있는 퀄리티인데도 비판적인 의견이 적다. 특히 하이브 사태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그룹을 향한 지적은 금기시되는 형국이다. 과도한 립싱크를 못 본 척하거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무대라도 내색하지 않는, 이상한 올려치기가 많아졌다. 최애 멤버의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예전이라면 언급할만한 지적인데도 이제는 입밖에 내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개저씨?", "하이브 알바?" 이런 댓글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착되고 있는 기준이 AR의 보편화다. 예전 같으면 AR이 무슨 라이브냐며 물고 뜯고 싸울만했는데 이제는 자칫 개저씨로 몰릴 수가 있다. "AR 뚫고 나오는 거 못 들음? 님 하이브 알바?" 독립운동도 아니고 치명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다툴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여튼 건전한 비판이 줄어들고 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 순으로 글램, 에스파, 아일릿, 아이브, 르세라핌, 뉴진스


새로운 기준

 비판적인 논조로 글을 썼지만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KPOP은 태생적 문제를 갖고 있다. KPOP이 세계적으로 유행한 이유는 가창력보다는 안무에 있다. 랜덤플레이 댄스는 있지만 랜덤플레이 노래방은 본 적이 없다. KPOP은 제작단계부터 안무에 초점을 맞추며 중요한 무대일수록 특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춤과 노래가 동시에 된다는 그룹도 AR을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 운동의 한계'다. 간혹 예전 아이돌은 춤과 라이브가 됐는데 요즘 아이돌은 실력이 없다는 비판이 보이지만 내가 볼 때 당시의 안무와 요즘의 안무는 차원이 다르다.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KPOP이 안무로만 뜬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사운드를 혼합한 도전적인 작곡도 장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웃지 못할 이유도 있다. 애초에 라이브를 할 계획이 없으니 더 자극적인 보컬, 더 변칙적인 음역대를 선정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서 불러도 라이브가 형편없다며 비판받는 경우, 실력 미달인 그룹도 있겠지만 곡의 태생이 라이브에 적합하지 않을 때도 많다. 속삭이는 목소리를 증폭하거나 해당 아티스트가 낼 수 없는 음역대와 발음을 차용한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신선한 곡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아지지만 그만큼 라이브는 어려워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라이브 AR'이 탄생한 것 아닐까?


 그동안 나의 주장을 '정의'라고 확신하며 적지 않은 아이돌 라이브 비판 글을 써왔다. 그런데 최근 철학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정의를 앞세운 이상주의는 생각보다 파괴적이며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나의 주장대로 KPOP 아이돌이 라이브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퍼포먼스는 움츠려 들고 작곡의 천장은 낮아질 것이다. 정의가 퇴보를 부르는 케이스다.


 여기서 잠시 일본 아이돌을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일본의 아이돌이 저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AR 0% 무대가 우리나라보다 많아서다. 그에 맞춰 안무도 싱겁게 짜이는 편이다. 일본 아이돌이 잘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국은 잘하는 아이들이 AR까지 쓰니까 더 잘해 보이는 것이고, 일본은 못하는 아이들이 AR도 안 쓰니까 더 못해 보일 뿐이다. 최근 일본 아이돌 업계는 KPOP 콘셉트를 차용하고 있다. AR을 즐겨 쓰며 과격한 안무를 앞세우는 그룹이 늘고 있다. 여기서 KPOP 아이돌이 라이브를 고집하고 안무를 하향하면 얼추 비슷해 보이는 눈높이가 형성된다. KPOP 산업의 라이브 강요는 경쟁에서 파괴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4와 2는 5와 1이 되어 격차가 심해 보였지만, 4와 2는 3과 3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립싱크 마크를 화면에 띄어주었던 기억을 회상하며 당장 도입하자는 의견이 많다. 나도 찬성하는 쪽이었는데 지금은 회의적이다. 공정한 시스템은 맞지만 정의구현은 미지수다. 립싱크 마크가 있던 때에도 아이돌 팬덤은 굳건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가끔씩 준수한 라이브 클립을 공개하면 아무리 립싱크를 많이 해도 코어팬은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혐오 조장의 심리도 있다. 과거의 립싱크 마크는 주로 경쟁자를 비방하거나 발라드 가수의 립싱크를 조롱하는 용도였지 드라마틱한 서열 이동은 없었다. 현재도 누가 나락에 갈 것인지 관전하며 도파민 파티를 기대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여기까지 도착하니 목소리가 AR을 뚫었으니까 라이브라는 주장을 납득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지금 수많은 KPOP팬들은 잘만 즐기고 있다. 팬들도 바보는 아니다. AR이 아무리 속고 속여도 팬들은 가창력이 좋은 그룹을 파악하고 있다. KPOP은 스포츠가 아니다. 그리고 비판 뒤에 숨어있던 칼날도 인정해야 했다. 솔직히 이상한 올려치기 현상이 오래갈 것 같아서 단념한 측면도 있다.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면 언젠가는 자정작용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다. 지금은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이고 KPOP의 성장을 응원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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