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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2. 2019

알프스가 수원인 호수의 색깔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2편 - 취리히(스위스), 뮌헨(독일)

2019.07.08 - 취리히(스위스), 뮌헨(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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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가 수원인 호수의 색깔은요


1박에 6만원짜리 호스텔은 달랐다. 조식에 무려 치즈가 세 종류나 나온다. 진심을 다해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세상에, 백만년만에 밥이랑 국을 본다. 무려 2주 만에 쌀이란 걸 씹어본다. 얇은 햄 위에 얇은 치즈 한장 쌓고 그 위에 밥을 싼 이른바 햄치즈밥쌈 완성. 밥이 이렇게 맛있는건가요? 소중한 건 이별 후에 안다지.

밥, 너 어색하다


부른 배를 안고 6시 반부터 일찍 호스텔을 나서며 괜히 뿌듯하다. 오후 2시에 뮌헨으로 가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8시간 안에 취리히를 정복해야 한다. 첫번째 타겟은 취리히 호수. 시민들이 애정한다는 이 호수는 google map에서 봐도 정말 컸다. 다 돌면 3시간쯤 걸린단다. 서쪽에서 북쪽의 올드타운쪽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20분도 안돼 도착한 취리히 호수는 아직 낮게 뜬 태양을 대칭으로 비추며 눈 따갑도록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바다라고 해도 믿겠다. 두 눈에 꽉 호수를 채우고 우두커니 앉아있으니 꼭 호수 안에 잠긴 느낌이다. 아직 사람들은 자고 있어 세상이 호수 목소리로만 가득하다.

음파음파, 마음은 헤엄치는 중


푸드득


아, 깜놀. 갑자기 옆에서 백조랑 청둥오리가 떼를 지어 나타난다. 금융가 1번지라는 명색과 정말 언밸런스한, 호수 위로 스케이팅하는 이 애들을 바라본다.이 넓은 호수를 자기 집처럼 노니는 너희들이랑 유럽 전체를 쏘다니는 나랑 뭔가 동질감을 느껴진다. 오늘은 왠일로 수영도 하고 싶네.

얘네가 원래 흔한 생명체였나, 취리히엔 진짜 많다


해가 밝으니 이제야 진짜 색을 보여준다. 하늘색이라기엔 초록빛깔이 담겨있고 청록색이라기엔 좀더 맑은 느낌이다. 만년설은 녹아서까지 이렇게 예쁘다. 4000m 고도에서 이곳까지 내려와 내 목까디 축여주다니 영광이다. 인간 이전에, 나 이전에 알프스가, 자연이 먼저 있었다는 걸 깜빡 잊고 살았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오만한 생각 속에서.

표현할 길이 없으니 알프스색이라 하자


카누를 타고 패들링 하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아침부터 의욕이 대단하다. 어 근데, 가까이서 보니 무슨 망을 들고 있다. 호수의 쓰레기를 건져 올리는 미화원이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알프스 색이 공짜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느낀다.

아침 8시부터 취리히 호수를 지키는 사람들


점심시간이 되니 시민들이 떼로 나타나 호수를 점령한다. 벤치 경쟁이 치열하다. 벤치에 기대어 누운 선글라스 낀 여자분이 넘나 멋져보인다. 저거다. 같은 포즈로 셀카봉에게 찍어달라 말하는 사이, 피크닉 나온 가족들에게 벤치를 뺏겼다. 울타리처럼 호수를 둘러싼 사람들, 꼭 주말에 한강 같다.

한참 대기타서 얻어낸 벤치에서 힘껏 다리를 뻗어봅니다


호수가 질릴 즈음 오늘도 네이버 현지투어를 참고해 유명해보이는 린덴호프에 올라본다. 기원전 로마가 쌓았다는 성의 유적지란다. 계단 따라 올라가며 성의 형태 대신 인파를 본다.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제대로 왔군.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성벽이란 곳에 다다라서야 여기가 왜 명소인지 알겠다. 취리히 올드타운과 그 타운을 가로지르는 리마트강을 드론이 되어 조망한다. 사실 조금 칙칙한 취리히 올드타운의 오래된 건물들이, 에메랄드 색 리마트강 덕에 나름 운치있어보인가. 이래서 한강 근처 아파트값이 비싼건가. 리마트강, 너가 다했다.

가장 전망으로 유명한 곳에서 취리히를 보고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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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하는게 미안해서, 아니 외로워서


하루 2만원짜리 스위스 유심칩의 뽕을 뽑아야만 겠다. 오늘은 영상통화의 날로 정했다. 이 순간을 위해 보조배터리도 빵빵하게 채워두었다.


여기 반호프거리라고
취리히에서 유명한 거리야!


첫번째는 엄마다. 좋아보인다며 안심하는 얼굴이 보인다. 학교에서 안좋은 일이 있어서 쌤들하고 맥주 한잔 하러 가신다고. 단 것만 사먹지 말고 야채랑 과일 많이 사먹으라고 대단한 눈치로 팩폭을 날리신다.


야, 너 혼자 갔어?


두번째는 팬더를 닮은, 절에서 같이 산 동갑내기다. 동네방네 알릴 일도 아니지만 급하게 온 지라 다들 SNS 사진으로나 여행간 사실을 접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널 보니, 융프라우에 같이 열차말고 등반으로 오르고 싶어졌다. 절에서 사는 네 몫까지 돈 벌어볼게. 같이 가자.


여기 취리히 호수인데
별로 예쁘게 안 나오네.


아빠가 드디어 받았다. 회의 직전이라는 바쁜 아부지. 그 피 같이 버신 돈으로 저는 이렇게 놀고 있습니다. 불효녀는 웃습니다. 내 행복이 아빠 행복.

영상통화 배경이 되어준 반호프거리


'다들 바쁘네.'

취리히 호숫가 옆 큰 나무 옆 잔디에 누워서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만 놀고 있고 나만 한가하다.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낀다. 옆에서 엄마랑 두 아들, 셋이서 카드게임을 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아들 한명이 갑자기 죽도록 웃는다. 좋냐, 흥.

그러고 보니 아는 사람 한명도 없이 24시간을 지낸 적은 처음이다. 늘 사람 곁에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다. 해방감과 소속감 사이,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이냐, 마음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버스 시간까지 잠이나 자야 겠다 싶다.

아무데서나 잘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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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7도, 텐트에서 자봤습니다


눈을 떠보니 뮌헨의 예쁜 하늘 아래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신선한 지평선, 그 위를 노을이 연한 남색과 연한 붉은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섬세하게 칠해놨다. 숙소까지 40분, 그까이꺼 걸어가자. 가다보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똑같은 지평선과 비슷한 건물들에 제자리 걸음 같다. 괜히 google map 현 위치를 새로고침하며 정신도 새로고침해본다.

mother nature의 그라데이션 띵작


뮌헨, 참 세련됐다. 이제까지 갔던 도시들이랑 다르게 최신식의 깔끔한 건물들이 깔끔한 일직선 도로 옆으로 깔끔하게 서있다. 아, 그래. 계획도시 같은 느낌이다. 그 위로 지나가는 흔하디 흔한 BMW들에 좀 당황한다. 여긴 봉고, 트럭도 BMW다. BMW도 별거 없구만. 미래당 울산시당에 출장 간 날이 생각났다. 고속버스에서 창밖 교차로를 보는데 에쿠스 뒤에 에쿠스가 연달아 5대 있는 걸 보고 놀랐었는데.

뮌헨의 BMW 박물관


'설마...'

건물은 하나 없고 무슨 공원 같은 곳으로 Google map이 안내하길래 경로를 2번 정도 다시 설정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싶을 무렵 공원 사이로 흐리게 캠핑장같은 곳이 보인다. 저기라고? 불길한 예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1만원, 무려 2순위 최저가랑 1만 3천원이랑 가격 차이가 난 걸 봤을 때, 그때의 쎄한 느낌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숙소 이름은 바로 '청년! 더 텐트'.


커다란 텐트 두개, 컨테이너 같은 리셉션 홀과 부엌과 식당.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서 노란 백열등 하나에 의지해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그 무리로 쭈뼛쭈뼛 합류해 체크인을 하니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담요 4개를 준다.


If you want more blankets, tell me.


아니, 더 달라고 하라뇨. 지금도 무거워서 눌려 자겠구만. 낑낑 담요를 들고 큰 텐트 안에 있는 침대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왜 스텝이 그렇게 친절했는지 알았다. 여기, 입김 나온다.

보기엔 진짜 예쁘다...


스페인도, 파리도, 스위스도(융프라우 빼고) 더울 때는 우리나라 한 여름, 추울 때는 초여름쯤 되는 날씨였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는 그 아이 편으로 긴팔은 죄다 싸가지고 보냈다. 정말 이렇게 생각이 짧을 수 있나. 유럽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지역마다 날씨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 버스타고 이동할 수 있는 지역이면 다 해봐야 서울에서 부산정도 거리같았다. 나의 미친 사고력에 말이 안나온다. 이게 다 한반도가 통일이 안되서 이렇다, 엉엉.

샤워장에서 초고속으로 물기를 닦고 살기 위해 머리를 말린다. 벽이 있다고 다 따뜻한게 아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융프라우 때처럼 있는 천은 다 껴입는다. 몸 위로 담요를 쌓는다. 조금만 뒤척여도 담요 바깥으로 삐져나가는 피부의 날카로운 촉감에 온몸이 긴장한다. 세상에, 잘 수 있을까. 응, 아니. 아까 노을볼 때 진짜 좋았는데, 또륵. 집에 가고 싶다.

사진 보기만 해도 소름.... 혹한훈련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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