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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쏘쏘 Jul 29. 2019

'아이유 섬'은 아이유만큼 예뻤다

스물여덟에 갑자기 유럽 16편 - 베니스(이탈리아)

2019.07.12 - 베니스(이탈리아), 부라노(이탈리아), 무라노(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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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섬'은 아이유만큼 예뻤다


눈을 떠보니 국경을 넘었다. 이틀 연속 야간열차에 숙박비 아끼고 영혼을 지불한 꾀죄죄한 초보 배낭여행객이 반짝반짝 빛나는 강 위의 도시에 선다. 너가 그 유명한 베니스구나. 예쁜 것도 몸에 힘이 있어야 느껴지나봐. 너 진짜 예쁜데 일단 난 숙소부터 가야겠어. 이틀 연속 아간열차라니 이 환상적인 일정 누가 짠 걸까, 하하.

영혼 없는 사람에겐 베니스의 예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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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 시간 아는데 제 몰골 봐서라도 안될까요. 응, 안돼. 3일간 못 씻어서 씻기만 해도 안될까요. 응, 안돼. 지금 일어난 사람들 씻어야 하거든. 화장실은 써도 된다 하셔서 화장실에서 3분만에 머리를 감았다. 임한결님의 영혼이 +50 상승하셨습니다.


원칙주의자 게스트하우스 아저씨에게 배낭만 맡기고 베니스 본섬보다 더 인기가 많다는 부라노섬으로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문화충격. 베니스의 버스는 차가 아니라 배였다. 노선이나 배차 간격이 서울메트로에 뒤지지 않는다. 배 타고 출근한다니 너무너무 신박하군.

베니스는 멀리서 봐도 예쁨


Burano, Burano!


배 타고 5분 신났다가 바로 기절. 나 같이 정신줄 놓은 여행객을 많이 보셨는지 선원분 목청이 장난 아니다. 부라노 섬은 일명 '아이유 섬'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유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 여기에 우리 지은이가 머물렀구나. 유애나(아이유 팬클럽) 10년차, 아이유의 '하루끝' 뮤직비디오를 잠시 감상하시겠습니다.

부라노보다 이지은, 이지은은 부라보

부라노섬은 우리 지은이만큼 비현실적으로 예뻤다. 알록달록한 저 벽 뭐야. 러블리하잖아. 배 타던 사람들이 멀리서도 자기 집을 알아보려고 벽을 원색으로 칠하다가 이런 예쁜 섬이 되었단다. 건물이 눈에 튀니 내가 참 칙칙하군. 아니, 지은이 뮤비 때문인가.

RGB섬이다(그래픽 디자인해본 사람들은 느낄 듯)

저기 새파란 건물, 오늘은 너다. 집 앞 벤치에서 열심히 셀카봉과 작업중인데 갑자기 팬티바람 아저씨가 옆문으로 나온다. 너무 놀라서 쳐다봤다. 아저씨도 날 쳐다봤다. '니네 집인 줄?'이라는 눈이시길래 '죄송합니다'라는 눈으로 대답해드렸다.

바로 저 커튼을 뚫고 팬티 아저씨가 등장하셨다

가다가 세상 내 스타일인 옷을 발견. 하지만 79유로(한화 약 10만원), 하하. 좋은 주인 만나서 꼭 행복해야 한다. 알고 보니 여기 부라노섬은 레이스로 유명하다고 한다. 가난한 배낭여행객 마음을 이렇게 다 흔들어놓다니, 나쁜 천들이다.

하늘하늘... 나중에 돈 벌면 데리러 올게...

한참 예쁜이 건물들이랑 놀다 이번엔 무라노섬으로 향한다. 무라노섬은 유리공예로 유명한 곳이다. 귀여운 악세서리가 많다. 유리라 그런지 색이 참 맑은게 내 스타일이네. 팔찌가 너무 예뻐 팔에 차다 떨어뜨렸다. 주인한테 딱 걸렸다. 그거 유리에요. 아... 그렇죠... 암... 쏘.... 쏘리....

예쁘다고 건드리면 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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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가 요란할수록 평온해진 이유


무라노고 부라노고 이젠 좀 자야 겠다. 체크인 시간 딱 맞춰 들어갔다. 눈 뜨니 5시, 배도 고프고 슬슬 나가볼까. 베니스 본섬의 센터, 사실 잘 모르면 강처럼 보이는 그란데 운하에 가서 좀 멋있게 걸터앉아봤다. 그 순간 그 짓 당장 그만두라며 비가 내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인증샷을 막을 순 없다

그때 머리가 간만에 기특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수상버스 1 day 티켓을 쓸 때야. 아까 무라노섬, 부라노섬 갈 때 왕복은 14유로, 원데이는 20유로라 값 차이가 너무 없어 혹시 몰라 원데이를 끊었다. 배 타고 노을 보고 배 타고 야경 보면 되겠네, 우하하하. 딱히 목적지 없이 아무 배나 탔다. 에잇, 하필 또 부라노 섬 가는 배다. 중간에 내려 다시 그란데 운하로 복귀. 이번엔 구글 지도까지 켜가며 노선을 체크한다.

하늘도 땅도 물물물, 수상버스에서 바라본 베니스

심심할 땐 반짝반짝 요란한 시내가 딱이다. 서초에 있는 절에서 생활하던 시절, 마음이 답답한 날엔 삼십분 걸으면 닿는 강남역 8번 출구를 찾았다. 번떡번떡 정신 사나운 네온사인과 패턴처럼 반복되는 사람 머리로 가득찬 강남대로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뻥 뚫렸다. 베니스에서 가장 유명한 리알토 다리도 강남역 8번 출구 못지 않게 요란하다.

쫄보는 인파가 무서워서, 새벽에 가서 독사진 찍었대요

내 마음보다 요란한 곳에 가면 오히려 평온해진다. 아무리 세상을 내 맘대로 하고 싶어도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고 빠른 걸. 그러니 그렇게 애써봐야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아무도 관심 안 준다니까. 너가 걔랑 사이가 안 좋아지든, 그 일을 말아먹든 말이야. 나는 바보같이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된다는 걸 눈으로 보고서야 포기가 됐다.


리알토 다리를 넘어 리알토 마켓으로, 리알토 마켓에서 산마르코 광장으로 주말 밤에 베니스로 몰린 엄청나게 많은 인파를 뚫고 나니 머리가 저 하늘처럼 텅 비었다. 숨만 쉬고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치만 나만의 세계에서 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밟혀죽지 않을 생각밖에 안드는 곳, 산 마르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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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오니 집이 달라보인다


다리 밑으로 이어지는 전통시장인 리알토 마켓부터 베니스에서 가장 핫한 산마르코 광장까지 이 수많은 관광객의 지갑을 노리는 예쁘고 맛있는 것들이 많지만 내 눈엔 조각피자밖에 안 보인다. 아까 부라노섬에서 올 때 2유로짜리 조각피자가 분명 있었다. 2유로짜리 나오면 사먹어야지. 골목골목 샅샅이 가격표를 노려봤지만 2.5유로 이하로 나오질 않는다. 이상하게 자존심 상해 안먹었다.

세상엔 먹을게 많지만 싸고 맛있는 건 적다

혼자 여행을 하니 사진찍는 거, 걷는 거, 먹는 거 말고 할 게 없다. 사람 많고, 다리 아프고, 돈 없으니 그냥 숙소로 갔다. 아, 좋다. 야간열차 두 번에 '두 다리 뻗고'의 소중함을 완벽하게 캐치했다. 핸드폰 보조배터리 충전해야 하는데. 결국 이층침대 사다리를 넘지 못하고 잠에 든다.

게스트하우스 Gio's house 꿀잠 이층침대

껌껌한 새벽, 눈을 떴다. 두리번두리번. 이층침대가 어렴풋이 보일 쯤에야 여기가 한국 아닌 줄 안다. 너무 마음 놓고 푹 자서 한국인 줄. 아직 1시네. 더 자야지.


일하던거 정리하고 집에서 쉬던 4, 5, 6월, 집에 있는게 그렇게 싫었다. 7시에 아버지 출근, 7시반에 어머니 출근 이후에 멍하니 쇼파에 앉아 있다보면 이 잉여로운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요가도 가고 기타 학원도 가봤지만 2개월 되니 흥미를 잃었다. 도저히 안되겠어 20분 거리 Yes24 중고서점에 아침 10시에 체크인, 밤 9시 체크아웃하며 미친듯이 책만 읽어보기도 했다.


일하는 사람에게 집은 휴식이지만 무직자에게 집은 게으름과 무료함이다. 그곳에 오래 있을수록 쓸모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했다. 공부중독, 일중독. 다른 건 무가치하다고 여긴 인생. 아니, 다른 건 할 줄 모르는 인생. 그 인생의 과보.


이틀 연속 야간열차 한번에 그 무료함이 그리워졌다. 체크인 시간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그 곳은 행복을 누리기 충분한 곳이었다. 게으르다고 하든, 쓸모없다고 하든, 그 얘기를 하는게 남이든, 내 스스로든, 그곳이 좋다면 그 순간부터 천국이 되는데. 보고싶다, 우리 집. 물론 지금은 이 삐걱되는 이층침대로도 행복하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유럽여행 상담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카톡 ID : one1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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