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인생의 중요한 20대에,
그 황금같은 시기를 10년이나 날린 거잖아.
평생 하고싶은 일에
재능이 없고, 지속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린 거야.
입시했던 시간까지 합치면 12년이네.
하아.
...
근데 있지, 의외로 괜찮았어.
삽질하길 참 잘 했어.
전시하기 위해서, 신진 작가끼리 모이고
경매하고 했다고 했잖아?
그걸 1회성으로 한 게 아니라
작가 접을 때 까지 5-6년이나 했어.
나중엔 우리같은 작가가 3000명 넘게 모여서
규모도 커지고, 제법 유명해졌어.
KBS 다큐멘터리에도 나오고
다른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더라.
처음엔 미술판을 흐리니 어쩌니 훈수두던
메이저 갤러리 갤러리스트들도,
대기업 회장님들과 연예인들도
우리 경매 파티와 전시에 찾아왔어.
재밌었지만 일이 엄청 많았어. 돈도 안 되고.
그래서 내내 쓰리잡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ㅎㅎ
같이 운영하던 작가들 다
잠 잘 시간도 모자랐던 것 같아.
근데 이 삽질의 시간동안,
미술작가로 살아남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다른 성과들은 많았어.
첫번째. 미술 시장 전반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완전 올라갔어. 컬렉터층, 갤러리스트들, 작가들 이런 구조로 이렇게 갑을이 형성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더라.
두번째. 미술 시장에서 탑티어 빼곤 아티스트는 갑을병정 중 정 정도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어.
내 첫 개인전이 완판됐다고 했잖아.
그 때 한참, 지난 22년보다 훨씬 더 미술판이 뜨거웠던 시기야. 우리가 처음 경매하고 전시하고 할때만 해도 미술경기가 매우 나빴는데, 4년쯤 됐을 때 블루칩 아티스트니 뭐니 해서 돈이 다 이쪽으로 몰렸어.
그러니 나한테까지도, 제법 괜찮은 갤러리들에서 연락이 오더라. 떨리는 마음으로 미팅을 했는데 한 관장님이 전속하자며 했던 얘기가 너무 충격적이었어.
요약하자면,
"너는 앞으로 뇌가 없다고 생각해라. 내가 시키는대로 뜰 수 있다. 너는 공장이라고 생각해라. 내가 그리라는 거 그려라."
그림을 잘 팔려면, 그 사람 얘기가 맞았겠지.
(모든 갤러리스트들이 그런 미친 소리 하는 것도 아니겠지)
근데 그 사람 말 듣기엔
내가 너무 미술을... 순수하게 사랑했다 ㅋㅋ
더럽히고 싶지가 않았어.
ㅅㅂ 그렇게 그림 그려서 돈 벌거면
그냥 취미로 숨어 그리고
따로 돈 버는 게 낫겠다.
뭐 그런 생각 했던 것 같아.
피가 뜨거웠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신진작가 커뮤니티에
그림이 좋은 친구들도 참 많았었어.
근데, 좋은 그림이랑 팔리는 그림이
일치하는 건 아니더라.
미술작가는 가장 고매하고
자유로운 직업인줄 알았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더, 미술판에 정 떼게 된 부분이 있어.
엄청 사랑하면서도. 애증이지 뭐.
그리고 세번째. 이게 제일 중요한 거야.
이 기간동안 잠 줄여 일한 덕에,
내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사실을
깨달은게 있는데
난 미술작가 재능은 별로 없지만
오퍼레이션과 기획, 커뮤니케이션은
좀 잘 맞는다는 사실.
엄청난 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