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은 언제나 좋다. 보다 더 맛있는 음식, 그리고 조금 더 새로운 요리사의 해석을 느끼는 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일이다.
내 지도는 그를 방증하듯 언젠가 먹어볼 다이닝과 디저트로 가득 차있다. 서울 내에만 몇 개의 핀이 꽂혀있는지 나도 셀 수가 없다.
내 핀에는 별점이 없다. 맛있는 곳은 실망을 하던 만족을 하던 다 같은 핀이다. 피은 오로지 음식의 종류로만 나뉘어서 색깔별로 정리해두었다.
하지만 유독 검은 핀으로 눈에 띄게 해둔 곳이 스무개 정도 있다. 나의 베스트 맛집이다.
맛과 별개로 내 취향과 너무 잘 맞아 몇 번이고 방문할 의사가 있는 '단골' 마크다.
이 검은핀의 식당들은 아무리 못가도 두 세번은 기본으로 방문했고 어느면에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위치가 좋기도 하고 해서 정말 많이 가는 곳들이 있었는데, 보통은 원래부터 단골장사를 하는 곳이다.
아는사람만 알음알음 흘러들오는 가게, 하지만 본인의 일은 정말 사랑해서 맛은 뒤쳐지지 않는 가게. 그래서 언제나 매출을 챙겨주는 고정 고객이 있는 가게. 그런 가게들이 언제나 내 마음에 쏙 든다. 너무 시끄럽지도 않고 단정하며, 사장님의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있다. 모든 것이 충족되니 이슈가 많은 곳보다는 이런 곳을 찾게 되면 무슨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소중하게 지도에 마크하고 늘 찾아간다.
이런 가게들은 손님의 얼굴을 잘 기억한다. 서너 번만 가면 어떤 음식을 시켜먹었는지 기억하고 살갑게 먼저 다가와주신다. '이번엔 또 뭘 마시고 싶냐, 친구들은 어디다 두고 왔냐'는 할아버지 바텐더. '오늘도 투샷으로 마끼야또 드릴까요?'라고 물으시는 바리스타. 이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프라이드에 새삼 감탄하고, 그들의 서비스에 푹 젖어 나도 모르게 맘을 열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객과 업주가 아닌 묘한 유대감도 느낀다. 거의 친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오늘은 머리를 좀 바짝 치셨네요.'
'날씨가 많이 춥죠. 오늘 숨겨둔 메뉴 있는데, 어떠세요?'
그런 인삿말을 듣고 대우받다보면 정말 친구가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잘 알아' 라고 확신하고 기대하게 된다. 사적으로 봐도 정말 재밌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유대감은 나를 계속 같은 가게로 이끌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날 따라 사장님과 대화가 잘 안되는 날이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외부인의 느낌을 받는다.
뭔가 늘 좋던 음식의 맛도 모르겠고, 식당이 오늘따라 어수선해 보이고, 늘 똑같던 사람 좋은 사장님의 웃음이 가식적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는데 단지 오늘따라 사장님과의 대화가 어긋날 뿐이고, 잘 이어지지 않을 뿐인데 말이다.
어떻게 해도 나와 사장은 남남. 당연하게도 남남이다. 당연히 거리감이 있어야 하는 거가 맞다.
단골 유치를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요식업의 스킬일 뿐이다. 사석에서는 남남이고 사실 그 사장님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왜인지 '단골이니까' 라는 이유로 사장님과 이 식당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골인 나에게 왜 이렇게 싸늘한거지?'
나 혼자 예민한거다. 그날따라 사장님이 피곤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디에 쓸데없는 쌀쌀함을 느낀다.
한층 더욱 나 혼자가 된 것 같다. 추위를 뚫고 이 식당에 혼자 앉은 내가 다른 무엇보다 외로워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단골 식당에서 맛도 생각 안하고 늘 같은 음식만 시켰던 것 같다. 지금 보니 왜 이걸 시켰지 싶다.
이 순간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이 식당에 오지 않는다면 사장님이 나를 기억할까?
답은 '아니다.' 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식기를 잡고 있는 손끝이 차갑다.
단순히 대화가 어긋난 것 뿐인데 말이다. 나는 단골 식당에 뭘 원한걸까.
그만큼 외로웠던 걸까. 그만큼 이 식당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나를 살갑게 대해주는 3자가 필요했던 걸까.
오늘따라 테이블과 주방의 거리가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