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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Sep 24. 2022

싱가포르- 슬로 러너의 첫 30분 달리기 보고서

Slow Learner임을 인정하자 Slow runner가 될 수 있더라

달리기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보고서는 자기 분석으로 시작하고 싶다.

나는 싫어하는 것도, 부족한 것도 많은 전형적인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니, 운동 기피자가 더 가까울 수 있겠다. 숨이 찬 느낌과 땀이 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지구력을 비롯한 운동 신경이 부족한 몸의 소유자.


나는 서른이 넘어 요가와 달리기를 하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사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더 깊은 곳에는 부끄러움 혹은 열등감이라 이라 불리는 퇴적물들이 두껍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전교 꼴찌야.."

체력장의 마지막 코스였던 '오래 달리기'. 나는 텅 빈 운동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중간에 도망을 가지도 못했다. 같은 학년 학생들은 오래 달리기를 마치고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쉬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다들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달릴 수가 없었다. 천천히 걷다가 조금 뛰는 것을 반복하며 학년 중 꼴찌로 완주를 한 후 마음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물에 빠진 .. 있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수영을 배우러 간 적이 있다. 수영 플레이트를 사용하는 초반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수영 플레이트 없이 수업을 하는 날, 나는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고 수업을 마무리하며 선생님은 내게 수업 후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혹시 예전에 물에 빠진 적이 있냐고. 물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을 했고 선생님이 그 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나는 부끄러워 더 이상 수영 수업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수영을 못한다.


"저 그냥 0점 주세요."

중학교 체육시간, 앞구르기 연습을 하는데 도저히 발을 땅에서 뗄 수 없었다. 무서웠다. 연습할 때는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옆으로 스르르 굴러 내 차례를 여러 번 피했는데 결국 수행평가 날이 다가왔다. 길게 깔아놓은 매트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친구들 순서가 지나고 내 차례가 왔다. 머리를 매트에 대고 발을 구르려고 했지만 그게 안됐다. 내 뒤에는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고 앞에는 선생님이 기다리고...  결국 나는 체육 선생님께 ‘정말 이거 못하겠어요.. 그냥 0점 주세요’라고 어렵게 입을 뗐다. 선생님은 그래도 해봐, 나는 못하겠다, 실랑이를 하다가 옆으로 굴렀던 것 같다.     




그렇게 운동을 싫어했던 내가 2021년 4월 어느 날, 달리기를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몇 가지 이유들이 마치 맞추기 쉬운 퍼즐처럼 적당한 시기에 잘 맞았다.


1. 시간적 여유: 일단 코로나로 인해 자택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출퇴근에 쓰는 시간이 줄었다.
2. 답답함: 대신 하루 종일 집(이라 쓰고 '방'이라 읽는다)에 있으니 답답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3. 체력: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활량도 늘리고 싶었다.

4. 호기심: 갑자기 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인들은 삼십 분씩, 사십 분씩, 어떤 날은 한 시간씩 뛰곤 했다. 궁금해졌다. 지겹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과연 얼마나 힘들까? 나도 할 수 있을까? 어떤 느낌일까?

5. 자기 인정: 서른넷이 돼서야 오롯이 인정했다. 나는 타고난 슬로 러너 (Slow learner)다.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느리게 배우는 몸 감각을 가졌다. 인정하고 나니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슬로 러너 (Slow runner)가 되어 앞으로 한발 한발 걷듯이 뛰면 어떻게든 되겠지.   


달리기를 시작한 후 아주 짧은 보고식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중 몇 개를 옮겨본다.  




1. 첫 달리기: 2021년 4월 14일

저녁 날씨가 좋았던 4월의 어느 날, 정시 퇴근을 했고 심심한데 컨디션은 또 좋았다.

K의 응원. 런데이 어플 추천, 펜으로 눌러쓴 이번 주 목표 (10분이라도 달려보자) 등이 떠올랐고 이들이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엉덩이를 떼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데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달리기를 해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한 게 두 달 전이었다. 막상 두 발을 움직이고 보니 저녁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었다. 첫 코스는 5분간 준비 걷기를 한 후, 1분 동안 달리고 다시 2분 천천히 걷기를 5세트, 마무리 걷기 5분이었다. 엄청 힘들지는 않았지만 내 자세가 이상했던지 정강이가 조금 아팠다.



2. 첫 아침 달리기 : 2021년 5월 6일

처음으로 출근 전 달려보았다.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던 참이었다. 허리도 불편하고 스트레스는 받고 이렇게 한 주를 보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가벼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한 번도 발 딛지 않은 곳들을 가보는 게 참 좋았다. 곧게 뻗은 새로운 길을 보면 여기서 달리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3. 열 번째 달리기 : 2021년 5월 13일

공휴일 아침, 천천히 일어나 8시쯤에 나가서 달리기를 했다.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2분 30초씩 뛰고 2분 걷기를 다섯 세트를 했다. 땀이 엄청 많이 나지만 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달리기를 하며 내 두 발로 빠르게 스쳐가는 바닥 표면의 느낌과 주변의 풍경, 공기, 달리는 사람들의 일부가 된 이상한 뿌듯함, 그래서 즐기고 있는 중이다.



4. 중도 포기한 열다섯 번째 달리기 : 2021년 5월 23일

바로 전날 몸이 너무 아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겨울잠을 막 마친 곰처럼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그게 기분이 좋아 호기롭게 달리기를 하러 나갔는데… 중간에 갑자기 갈증이 나고 현기증이 심하게 났다. 아,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달리기를 멈추고 음식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5. 열여섯 번째 달리기: 2021년 5월 25일

이틀 전 포기했던 프로그램으로 다시 달렸다. 오늘은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즐겁게 성공!

 


6. 첫 10분 연속 달리기 : 2021년 6월 3일

코스 : 준비 걷기 5분 - 달리기 10분 - 걷기 3분 - 달리기 10분 - 마무리 걷기 5분

처음으로 10분간 연속으로 뛰어보았다. 10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다행히도 숨이 턱 끝까지 찬 채로 러닝을 마칠 수 있었다.  



7. 첫 15분 연속 달리기: 2021년 6월 8일

코스 : 준비 걷기 5분 - 달리기 10분 - 걷기 3분 - 달리기 15분 - 마무리 걷기 5분

15분..? 15분을 어떻게 달리지?

지하철을 타고 공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걱정, 두려움이 있었는데 첫 10분을 달리고 나자 땀은 많이 나지만 숨 쉬기가 어렵지 않아서 너무 신기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그 후 15분을 달리는데, 아는 길을 달려서 그런가, 팟캐스트가 재밌어서 그런가, 아니면 노을이 환상적으로 지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힘이 많이 들지 않아서 신기했다. 다 달리고 무릎이 아주 조금 아프긴 했는데, 금방 괜찮아졌다.



9. 첫 30분 연속 달리기: 2021년 7월 9일

동화 속에 나올법한 예쁜 파랑새를 보았고, 엄청난 크기의 주황빛 해가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풍경을 선사했다. 선물 같았다. (이런 의미부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보 러너가 된 지 두 달 반, 3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했다.

나 같은 사람도 달릴 수 있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달리는 건 힘들지만 기분이 진짜 좋다. 초보 러너로서 내 몸이 이렇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느린 속도지만 좋아지는구나!라는 그 신기함 -

그리고 모자를 쓰고 달려도 이렇게 살이 까매지는구나, 햇살을 맞으며 느린 속도로 진하게 변하는 내 피부색이 재밌다.


오랫동안 단단히 굳어온 내 안의 문제들이 꽤 많이 해결된 느낌이다. 치유라고 하면 조금 거창할까.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다 보면 결국은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는 확실히 나아진다.

인정하고 나니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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