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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Nov 22. 2024

싱가포르 - 한 할아버지와 모두의 이야기

배려하며 살래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신다. 확신하건대, 이 동네 사람들 중 그 할아버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눈이 안 보이면 집에만 계실 것 같은데도, 모두가 그를 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의 기동성과 존재감 때문이라 답할 것이다.


그 기동성과 존재감의 핵심에는 할아버지 옆에 늘 그의 눈이 되어주는 동행자. 바로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봄 메이드다. 포근한 인상에 따뜻한 미소를 가진 그녀는 보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팡이와 큰 목소리도 한 몫한다. 할아버지는 긴 지팡이를 들고 걷다가 이따금 지팡이를 짧게 흔들어 거리감을 잰다. 위험할 수도 있느니 항상 그전에 우렁찬 목소리로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큰 목소리의 할아버지와 부드러운 동행자의 조합은 이상하게도 신선하다.


어느 날이었다. 집 앞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는 이미 만원이었고, 안에는 나, 다른 주민 한 명, 그리고 한 가족(아빠, 엄마, 아이 둘)이 타고 있었다. 문이 닫히려던 순간, 익숙하고 우렁찬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버튼을 눌렀고 동행자는 거의 꽉 찬 엘리베이터를 보더니 앞으로 걸어가려는 할아버지를 부드럽게 막으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먼저 가세요. 괜찮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도 멈춰 서서 말했다.


“고마워요. 먼저 올라가요.”


그때 가족의 아빠가 다정한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자리 많아요. 얼른 들어오세요.”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지휘를 하듯 말했다. 


“얘들아,

엉클(Uncle) 들어오실 수 있게

얼른 자리를 만들자.”


아이들이 웃으며 즉시 움직였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조금 더 공간을 만들었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동행자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 순간, 어쩌면 별거 아닌데도 묘하게 마음이 찡했다. (그래서 이렇게 적고 있는 거겠지요!)


할아버지는 밝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건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 안에는 따스한 분위기가 흘렀다. 모두가 자연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작은 공간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라면, 여전히 나눌 수 있는 여백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참 따뜻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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