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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amola Feb 19. 2020

'뭐든 적당히'를 모르면 생기는 일

런던과 이별하는 일 D-17 | 미래를 자꾸 현재로 끌어오는구나

이 브런치의 글을 종종 와서 읽으시는 분들의 대부분은 미래에 대해 먼저 앞서 걱정하고, 계획하는 모범생일 거라 짐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워홀 실패담이며, 워홀 오기 전에 알았으면 하는 것들, 런던에 치여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곳 등에 대한 글을 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내가 미래를 대비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가 적당히를 모르고, 미래를 끌어다가 현재의 시간을 살며, 그렇게 해서 아낀 시간을 미래에 누리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은 안일한 안전지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들어줬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해 줬으나, 성격대로 사는 것도 적당히를 못해서 이제는 나 자신에게 "적당히, 제발 적당히 좀 하자. 진짜!"라고 소리치고 싶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면서 학교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학생이었다. 모교는 인문계였음에도 불구, 젊은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는데, 나는 늘 그 다양한 프로그램의 임원이거나 참가자를 자원했다. 그 결과, 내 학생 기록부는 교내외 경험만으로 A4용지 12장을 넘겼고, 양으로는 전교 1등을 거머쥘 수 있었다 (오히려 성적으로 전교 1등 하는 게 더 편하겠다고 친구들이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급증 덕분에 방대해진 생활 기록부가 대학교 진학에 도움을 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사실 1%의 덕도 보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그 새를 못 참고 또 해외로 유학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생활기록부는 공들여 쌓은  인생의  '허송세월'이었다. 


스스로가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는 번식할 수 없는 민들레 꽃을 닮았다 생각했었다, 이미지 출처: Hasan Almasi on Unsplash


해외 유학을 결심했을 때도, 나는 조기유학 한 번 가본 적 없으면서, 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싶었다. 영국 대학 조기 졸업이 학부 성적을 바탕으로 가능한지는 아는 바가 없으나, 내가 택했던 방법은 파운데이션(Foundation) 코스를 스킵하는 것이었다. 영국 예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파운데이션 코스를 거쳐야만 본과로 진학할 수 있다. 그래서 원칙대로 라면 대학교를 졸업하는데 파운데이션 1년+본과 3년= 4년이 드는데, 파운데이션을 하지 않으면 3년 내에 졸업이 가능해진다. 물론, 적당히를 모르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부정 청탁, 기부 입학 이런 건 아닙니다) 결국에는 인터뷰에서 1학년 무조건부 오퍼 (Unconditional Offer)를 받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1년을 스킵해서 간 대학에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정도(正道)가 정도(正道)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워홀도 같은 이유로 온 것이다. 유학 생활 내내 과제며, 언어며 따라잡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뻔해놓고, 그걸 2년만 더 응축해서 고생하면 런던 생활도, 영어도 '마스터'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혹시나 나 같은 자기 채찍러들이 있을까 봐 말씀드리자면, 영국에서 워홀로 2년 산다고 영어가 마스터되는 그런 신기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제2 외국어는 어느 날 귀가 트이고, 입이 트이는 기적이 아니라 꾸준히 내 입과 귀에 그 언어를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적당히를 모르며 살다 보니, '대체 왜?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대체 뭐가 하고 싶어서?'라는 의문을 26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가지게 됐다. 26살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이런 생활을 17살 때부터 9년을 했으면, 그래서 좌절을 겪었으면, '앞일을 당겨 미리 해치운다고 미래에 그 시간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라는 진리는 배울 법한 충분한 시간인 것 같아 현타가 오는 것이다.


경험상, 뭐든 적당히 노력할 줄 모르고,

본인 능력에 맞지 않는 일을 자꾸 도모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친구, 연인 혹은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인생에 좋아하는 건 하나도 없다, 해야 할 일만 있을 뿐!

모든 일을 시작하는 기준이 그 행위를 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에 달려있다.

혹시라도 실패할 경우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남은 게 없지?'라는 공허함

나는 없고, 내 성취만 남는다.

주변 가족과 지인들이 내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때마다 응원하기보다는 자꾸 안쓰러운 모습으로 바라본다.


이미지 출처:  Miti on Unsplash


성취 중독자라면 이런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새로 오픈한 빵집의 빵을 먹어보는 게 하루의 낙이 되고, 선물 받은 화병에 무슨 꽃을 꽂아야 예쁠지 고민하는데 시간을 쓰고, 책을 읽고 친구와 열렬히 토론하면서 저녁을 보내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니 앞으로는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도껏 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법, 현재의 삶만큼만 열심히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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