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절망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존엄을 위해 감옥을 택하다

by 설탕바른위로

이 글은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감정수업』을 길잡이 삼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중 10가지 감정을 소설과 함께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인문학 연재입니다.


[1부] 의심이 사라진 곳에 깃드는 병: 절망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안고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 비밀이 탄로 나는 순간, 당신이 쌓아올린 모든 존엄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사랑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공포.

그 공포 때문에 차라리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썩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까?


1995년, 독일의 법학자이자 소설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를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수치심과 존엄, 그리고 절망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소설은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끝에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의 비극과 한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는 ‘절망’의 심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한나 슈미츠. 그녀는 나치 수용소 감시원이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진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법의 심판이나 감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죽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이 사라진 순간 찾아온 명징한 ‘확실성’이었습니다.


절망 (Desperatio): 희망의 다른 이름은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흔히 ‘희망이 없는 상태’를 절망이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을 떠올리죠. 하지만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통찰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습니다.


절망 (Desperatio)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절망은 '불확실성(의심)'이 사라질 때, 즉 우리가 두려워하던 나쁜 결과가 ‘확실해질 때’ 찾아온다고.


우리가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아닐 수도 있다’,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합니다. 의심이 남아있는 한 희망도 살아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의심이 걷히고, 두려워하던 파국이 움직일 수 없는 현실(Fact)로 확정되는 순간, 희망은 증발하고 그 빈자리에 차갑고 무거운 슬픔, 즉 ‘절망’이 들어섭니다.


한나 슈미츠의 삶은 바로 이 공포와 희망, 그리고 절망의 위태로운 줄타기였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은폐


이야기는 1950년대 말 독일, 간염과 성홍열에 걸려 거리에서 구토를 하던 15세 소년 미하엘을 36세의 전차 검표원 한나가 도와주면서 시작됩니다. 병이 나은 후 미하엘이 감사 인사를 하러 한나의 집을 찾으면서, 두 사람의 기묘하고도 격정적인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사랑에는 기이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한나는 관계를 갖기 전, 언제나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슐러의 희곡부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까지, 미하엘은 그녀를 위해 목이 쉬도록 책을 읽었습니다.


소년 미하엘에게 그것은 사랑의 전희이자 낭만적인 의식이었지만, 한나에게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녀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文盲)’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인 문맹을 감추기 위한,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지적인 세계를 공유하고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완벽한 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한나는 전차 회사에서 사무직 관리자로 승진 발령을 받게 됩니다. 남들에겐 기쁜 소식이겠지만, 글을 모르는 그녀에게 사무직은 자신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한나는 승진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문맹이 미하엘에게 들통날까 봐 말 한마디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춥니다. 그녀에게 문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감수해서라도 지켜야 할 절대적인 비밀이었습니다.


법정에서의 재회, 그리고 치명적인 선택


세월이 흘러 8년 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우연히 참관하게 된 법정에서 피고인이 된 한나를 다시 만납니다.

그녀는 나치 친위대(SS) 소속으로 유대인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으며, 수감자들을 이송하던 중 화재가 난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을 타 죽게 한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재판 과정은 한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함께 기소된 다른 감시원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한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깁니다.


재판장은 한나에게 묻습니다. 보고서를 당신이 썼느냐고. 그리고 사실 확인을 위해 필적 감정을 하겠다며 글씨를 써보라고 요구합니다.


이 순간, 한나는 인생 최대의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면 누명을 벗고 형량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침묵하면, 그녀는 끔찍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을 살아야 합니다.


한나는 선택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썼어요.”


그녀는 문맹임을 들키느니 차라리 살인범이 되기를, 자유를 포기하고 감옥에서 썩기를 택합니다.

그녀에게 문맹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수치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한나에게는 아직 ‘절망’이 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비밀이 밝혀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공포’**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공포 속에서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비루한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옥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그녀에게 뜻밖의 희망이 찾아오면서 비극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일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오늘의 질문

Q. 당신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혹은 인생의 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감추고 싶은 치부가 있습니까?


Q. 혹시 그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더 소중한 것'이나 '나의 진짜 모습'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Q. 한나의 선택이 어리석어 보이나요, 아니면 그 처절한 자존심에 공감이 가나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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