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배운 여자와 답장하지 않는 남자
이 글은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감정수업』을 길잡이 삼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중 10가지 감정을 소설과 함께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인문학 연재입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탄로 나는 것이 죽기보다 두려워,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택한 여인 한나.
법정에서 그녀의 비밀을 알아챈 유일한 사람인 미하엘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혹은 나치 부역자를 사랑했다는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침묵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한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감옥이라는 고립된 섬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곳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기묘한 방식으로 다시 시작됩니다.
한나가 수감된 지 8년이 지났을 무렵, 미하엘의 삶은 공허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딸을 낳았지만, 아내 게르트루트와의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있을 때조차 끊임없이 과거의 한나와 현재의 아내를 비교했습니다.
그녀의 손길이나 감촉, 냄새와 맛, 그것은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 ……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미하엘은 이혼을 하게 되고, 철저한 외로움 속에 남겨집니다.,
이때 그가 도피처로 선택한 것은 ‘과거’였습니다.
그는 불현듯 학창 시절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사서 밤마다 책을 소리 내어 읽고 녹음하기 시작합니다. 『오디세이』,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 카프카….
그는 이 테이프들을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보냅니다. 인사말이나 안부 편지 한 장 없이, 오직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만을.
미하엘에게 이 행위는 일종의 ‘퇴행’이자 ‘의식(Ritual)’이었습니다.
현실의 실패(이혼)로부터 도망쳐, 자신이 가장 사랑받았고 우월감을 느꼈던 시절, 즉 ‘책 읽어주는 남자’로서 한나를 지배하고 보호했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적 시도였습니다.
그에게 한나는 여전히 글을 모르는, 자신의 목소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 관계에서 자신이 안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감옥 안의 한나에게 이 테이프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나치 전범’,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할 때, 유일하게 도착한 미하엘의 목소리. 그것은 그녀에게 ‘아직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위안이자, ‘미하엘은 내 치명적인 비밀(문맹)을 모를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그가 내 비밀을 알았다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책을 읽어 보낼 리 없다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희망은 한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존재로 남기를 거부합니다.
한나는 미하엘이 보내준 테이프를 듣고 또 들으며, 교도소 도서관에서 해당 책을 빌려 글자와 소리를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50대가 된 여인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글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수치심(문맹)을 극복하고, 마치 처음부터 문맹이 아니었던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여 미하엘과 대등하게 마주 서기 위함이었습니다. 글을 알게 된다면, 과거의 부끄러운 비밀은 덮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녀는 글을 깨우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녀는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등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들의 책을 빌려 읽습니다.
글을 몰랐던 시절, 그녀에게 유대인 수송은 그저 ‘직무’였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피해자들의 고통을 ‘사유’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였는지를 문자를 통해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깨달음의 과정 끝에, 그녀는 용기를 냅니다. 이제는 ‘책을 듣는 여자’가 아니라 ‘글을 쓰고 읽는 주체’로서 미하엘에게 말을 걸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어느 날, 미하엘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빼뚤한 글씨. 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
이 짧은 네 문장은 한나 인생 전체를 건 거대한 도박이었습니다.
이 편지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 “나 이제 글을 알아요. 당신이 알던 무식한 한나가 아니에요.”라는 성장의 선언.
둘째, “이제 우리, 글을 아는 대등한 인간으로서 소통해요.”라는 관계의 변화 요청.
셋째, 그리고 무엇보다 “내 과거의 비밀(문맹)을 덮어두고, 변화한 지금의 나를 받아주세요.”라는 간절한 인정 욕구.
한나는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미하엘이 자신의 변화를 기특하게 여겨주길, 혹은 “언제 글을 배웠어?”라며 놀라워해주길, 그래서 이제는 일방적인 낭독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가 시작되길 꿈꿨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미하엘의 답장은, 자신이 세상과 화해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유일한 보증수표와도 같았습니다.
만약 미하엘이 그녀의 비밀을 몰랐다면 이 편지는 자연스러운 소통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고, 설령 알았더라도 그녀의 변화를 인정해 준다면 과거의 수치심은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하엘은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나의 편지를 받고 당혹감과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침묵을 택했습니다.
편지 대신, 그는 이전과 똑같이 기계적으로 책을 읽은 녹음테이프만 보냈습니다. 한나가 또다시 짧은 쪽지들을 보내왔지만, 그는 끝내 단 한 줄의 답장도 쓰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표면적으로 미하엘은 나치 전범인 그녀를 용서할 수 없어서, 혹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라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더 이기적인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미하엘이 원한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가 사랑한 대상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를 필요로 했던 ‘과거의 한나’였지, 글을 깨우치고 자신의 죄를 고민하며 동등한 위치에 서려는 ‘현재의 늙은 한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한나의 문맹 탈출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해놓은 환상(책 읽어주는 남자와 듣는 여자)의 파괴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한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계속해서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둬두려 했습니다.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적극적인 거부이자 은밀한 처벌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절망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한나는 미하엘의 침묵을 통해 끔찍한 진실을 깨닫습니다.
만약 미하엘이 내 비밀(문맹)을 몰랐다면, 내가 글을 쓴 것에 대해 놀라거나 칭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 반응 없이 테이프만 보낸다는 것은, ‘그는 이미 내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연기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미하엘의 침묵은 한나에게 있던 마지막 ‘의심(혹시 그가 내 비밀을 모르지 않을까? 혹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을 제거해버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미하엘은 나의 가장 수치스러운 치부를 다 보고 있었다.
그가 보낸 테이프는 사랑이 아니라, 나를 불쌍한 문맹으로 취급하는 기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글을 깨우치고 변화하려 노력한 ‘지금의 나’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미하엘은 한나가 글을 아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책 읽어주는 남자’로 남기 위해, 한나가 계속 ‘듣는 여자’이자 ‘문맹인 한나’로 남아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의 침묵은 한나의 성장을 무시하고, 그녀를 과거의 감옥에 가두는 행위였습니다.
이 확실성이 찾아온 순간, 한나의 마음속에 타오르던 희미한 희망의 촛불은 꺼졌습니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불확실한 공포가 ‘확실한 현실’이 되었을 때 절망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자존심은 무너졌고, 유일하게 믿었던 사랑은 거짓과 기만으로 판명 났습니다.
세상 모든 것과 연결이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태.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막다른 골목.
그리고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18년 만의 출소 날짜가 다가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하지만, 희망이 거세된 그녀에게 세상 밖은 또 다른 감옥일 뿐입니다.
내일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오늘의 질문
당신은 누군가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며 과거의 틀에 가두려 한 적이 있습니까?
미하엘처럼,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이나 결핍이 유지되기를(상대가 나를 계속 필요로 하기를) 바란 적은 없나요?
누군가의 침묵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