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기록이 만든 가능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 폐업 후 받기 시작한 실업급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엔 여유롭게 생각했는데, 막상 끝이 보이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예전처럼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간 동안 내가 진짜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답은 다름 아닌 10년 넘게 써온 기록 속에 있었다.
삶을 다시 설계하기로 마음먹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10년 넘게 써온 블로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그저 쓰고, 발행하고, 다음 글을 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치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듯, 차근차근 내가 써온 글들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책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내가 유독 '관계'에 대한 이야기나 '작은 변화'를 다룬 책들에 끌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성공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성장 이야기에 더 많은 문장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좋아하고 있었다. 관계, 변화, 일상의 소소한 요소들까지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좋아했었다.
여행 기록에서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동네 골목이나 작은 카페에서의 경험을 더욱 좋아해서, 그에 대한 글이 많았다. 특히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나, 혼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꼈던 순간들을 기록해두고 있었다.
카페 소개글을 보면 명확했다. 인테리어 보다는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그리고 좋아하는 커피의 맛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인테리어는 직업적인 측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게 당연했다. 그 공간에서 혼자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 카페에서는 왜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까?" "혼자 온 사람들도 편안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이 커피를 마셨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일까?" 같은 질문들을 던지며 사색의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 시간을 천천히, 깊게, 그 순간을 음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별것 아닌 일상을 기록해온 것들이, 결국 나라는 사람의 지도가 되어 있었다. 나는 화려하고 급진적이고 또 극적인 것보다는 소소하고 진실한 것에 끌리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콘텐츠가 아니라 자산이었다
결국 나는 이 모든 기록들이 내 자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니, 단순히 소개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내가 공간을 어떻게 읽어내는지, 어떤 디테일에 주목하는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건 단순한 리뷰가 아니라 내 시각과 관점을 보여주는 포트폴리오이기도 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고, 다른 감상을 남긴다. 내가 쓴 리뷰들을 모아보니 내 철학과 가치관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었다. "이 사람은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명확히 보였다. 이게 내 관점이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방식이었다.
이 모든 기록들이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자료들이었다. 더 중요한 건, 이 자료들이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쓴 모든 글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더 깊이 있는 작업을 해볼 수 있겠다는 방향성이 보였다.
좋아하는 것을 더 깊이
회사에 다닐 때는 블로그가 '취미'였다. 퇴근 후 남는 시간에, 주말에 틈틈이 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하루 종일 좋아하는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을 때도 예전보다 천천히, 더 많은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한 권의 책에서 여러 개의 글감을 찾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한 문장에서 하루 종일 생각할 거리를 얻기도 한다.
나누는 것에서 찾은 확신
혼자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장 큰 기쁨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껴진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솔직하게 나눴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걱정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실업급여도 곧 끝나고, 수입원이 불확실하다. 하지만 예전의 불안과는 질이 다르다. 예전에는 "언제까지 이 회사에 다녀야 할까?"라는 막막한 불안이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건설적인 불안이다.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방법을 찾아가면 된다. 좋아하는 책을 주제로 한 모임을 기획해보기도 하고, 내가 자주 가는 카페들을 연결한 카페 투어 코스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아직은 작은 시도들이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는다. 10년 동안 쌓아온 기록들이 이제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 이것이 내가 평생 해도 지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하지만 여전히 답해야 할 질문들이 남아있다.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남들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10년간의 기록이 내게 방향을 알려주었다면, 이제는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