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발자국을 남기고, 마음에는 관성이 존재한다

1. 강박적인 사람

by 빨간모자

나는 타인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혼나고 말지 뭐"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기는 사람들, 타인이 싫은 소리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난 신경질적인 불쾌한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아예 듣지 않기 위해 일을 할 때는 완벽하게 실수 없이 하려고 한다. 불평불만 가득한 민원이 제기될 것 같으면 민원을 원천 차단하도록 먼저 세심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불쾌한 감정을 느꼈던 경험은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내가 유난히 날이 선 비판과 비난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그런 말들을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선배한테 예의가 없다고 불려 가서 혼나고, 밥을 빨리 안 먹는다고 할아버지냐고 혼나는 등등...


우리의 마음에는 편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관성이 존재한다.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마음의 벽을 세우고 신경을 아예 꺼버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기도 한다. 어떠한 불쾌한 상황에 상당한 반항심을 가지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바른 자세'를 싫어한다. 예전에 선배들 많이 있는 자리에서 똑바로 앉아있지 않는다고 모두가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수치스러우면서 불쾌한 감정 때문인지 바른 자세로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공식 행사 등)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었다. 대신, 다리를 꼬고 비뚤게 앉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등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바른 자세는 이상하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바른 자세로 앉아 있기를 나에게 바라는 경우에는 강요한다고 느껴져서 반발심이 생기곤 한다.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관련된 상황을 회피하거나 반항하게 되는 현상은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불쾌한 감정은 '불쾌'하고, 편안한 감정은 '편안'하니까. 우리는 편안함을 선호하고, 불쾌함을 피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본능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예로 들면, 조직생활에서 불쾌한 경험을 자주 겪었던 사람이 조직을 떠나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것도 결국 정신적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 이루어지곤 한다. 다시는 꼰대 같은 상사와 동료를 만나지 않을 수 있으면서,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적절한 사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금융계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고유한 업무 수행을 해보고 있다. 대학 때나 군대생활을 할 때 윗사람에게 혼났던 경험이 많아서 결재를 받을 때마다 너무 긴장되고, 실수할까 봐 반복적으로 확인을 하곤 한다. 팀장 성격이 상당히 직설적이면서 강하고, 인턴 초기에 한번 혼나 봤기에 실수를 하면 얼마나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지 알고 있어서 더욱 실수가 두려웠다. 금융 관련 업무 자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고, 근본적으로 업무가 복잡하고 어려운데, 숫자 하나만 틀리더라도 복잡하고 번거로운 수정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또한 돈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직무와 비교했을 때, 고객들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고, 팀장과 같은 책임자들도 엄격하게 일처리를 하는 편이다. 즉, 실수를 하면 고객과 책임자에게 많이 기분 나쁘게 깨지면서, 번거로운 업무 과정을 한번 더 거쳐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다.


업무를 수행하고 결재를 받을 때마다 과거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혼났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기억과 함께 당시의 불쾌한 감정도 같이 느껴진다. 그때의 기분이 재현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실수를 해서 혼나진 않을까, 기분 나쁜 소리를 듣진 않을까 무의식적으로 불안해하곤 한다. 그래서 확인을 정말 여러 번 한다. 숫자를 잘못 입력하진 않았는지, 클릭을 잘못해놓거나 업무 처리 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건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곤 한다. 불안함에 자연스레 강박관념이 떠오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강박증상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참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만큼 과거에 겪은 일들이 나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줬었던 일이니까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영화 '인셉션'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대사를 하나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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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잊으라고 하면 더욱 기억나는 법이다. 잊으라고 강요해서 과거를 잊을 순 없다. 시간이 약일뿐이다. 힘들었던 과거는 정신적 위로를 통해 불쾌했던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흐리게 만들며 잊어가야 한다.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가며 감정적으로 강렬했던 기억에서 의미 없는 기억으로 바꿔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픔에 직면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조언하는 것이다. 일단 직면해야 나 자신에게 위로를 할 수 있으니까. 내 마음에게 잊어버리라고, 털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힘들고 괴로웠었을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이 아픈 과거를 잊는 데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아이러니하다.


인생이란 인내하는 것이 아닐까. 실수와 질책에 대한 불안함을 참아가며 하루하루 업무를 수행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과거를 훌훌 털어버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 계속 과거의 그늘 속에서 불안함을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계약했던 인턴 기간이 며칠 안 남아서 조만간 탈출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늘 느끼곤 했었다. 실수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완벽주의자가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일인 것만 같았다. 인턴이 아니라 정식 직원이었다면 어땠을까. 매일 불안과 괴로움을 인내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이쪽 길로 직업적인 진로를 걸어갈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불쾌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전부 막을 수 없고, 괴로웠던 과거를 쉽게 잊어버릴 수도 없다. 시간이라는 약을 살살 발라가며 잘 버틸 수밖에 없다. 오늘 하루를 잘 버티고, 내일 하루를 잘 버티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최대한 상처 받지 않고, 맞지 않는 옷은 입지 않으며 자기 스타일대로 편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그리고 과거 따위는 훌훌 털어버릴 줄 아는 쿨한 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앞으로의 내 목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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