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지하는 사람
대학 친구 중에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항상 나를 안 만나주는 친구 A가 있었다. 수업을 같이 들을 때만 함께 있을 수 있었고, 저녁에나 주말에는 따로 만나기가 어려웠었다. 늘 그 이유는 같았다.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여자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날을 피해서 만나려고 하면, 내가 시간이 안 되거나 A에게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다 가끔씩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A는 여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면서 금방 사라지곤 했었다. A의 시간은 여자 친구에게 늘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A는 나를 많이 좋아하는 듯했었다. 친구의 친구로서 인연이 닿았었는데,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나의 성격상 이런 유형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기 힘든 편이다. 친구의 친구로서 만나왔던 수많은 과거의 인연들과 비교했을 때 A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다. 초면부터 잘생겼다며 칭찬을 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고 하니, 나로서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칭찬을 꺼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참 괜찮은 친구라는 느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원래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걸 다른 사람들도 느끼는 건지, 상대방도 나에게 먼저 다가오지 않곤 했었다. 이게 지금까지의 내 인간관계 패턴이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했다. A는 내가 먼저 다가갈 만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서툴고 조금 모자라지만, 내 스타일대로 A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번호도 먼저 물어보고, 자리도 옆에 덥석 앉곤 했었다. 툭툭 친밀감 있게 장난도 치고, 연락도 자주 했다. A도 그에 곧잘 호응했다.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려고도 했었다. 이때마다 A는 여자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곤 했었다. 주말에 어디로 놀러 가기로 했다, 저녁에 술 마시기로 했다 등등. 여유로운 시간에는 늘 여자 친구와 함께 하다 보니,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커플은 서로에게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혼자 있게 될 때마다 A를 불렀고, 중간고사가 끝난 뒤처럼 특별한 시간에도 A를 불렀다. 그리고 A는 여자 친구가 부르면 늘 거절하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 대신, 거절당하는 입장은 나였다. 그렇다고 A가 나에게 언제 만나자고 제안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관계가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친한 관계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만나자는 제안이 거절될 때마다 조금씩 내 마음의 문은 닫혔다. 이 친구와 지금보다 더욱 친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속 거절당하다 보니, 만나자고 말하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은 잘못된 삶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내는 자립심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나약함을 티 내는 것이라 생각해서 문제가 생겨도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었다. 학교에서 책이 없을 때는 없는 대로 상황을 넘기는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검색하거나 관련 자료를 살펴보며 직접 찾곤 했었다. 내 머릿속에는 책을 빌린다거나,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보다는 속으로 다시 생각해보며 혼자 마음을 가다듬고 해결책을 찾곤 했었다. 타인의 공감과 위로는 없었고, 대신 자아성찰과 비판만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 성격에 맞는 올바른 방법이라 믿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떨쳐낼 수 없는 습관이자 인생철학이 되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꿔버릴 수 없듯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의지하는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A에게 서운한 감정보다는 부러운 감정이 더 강했다. 매번 만나주지 않는 점은 서운했지만, 그에 반대로, A에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언제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랬고, 와 달라고 말하면 바로 달려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랬다. 언제든지 내 곁에 있어주면서, 힘들 땐 힘들다고, 기쁠 땐 기쁘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바람 좋고 맑은 날 강변 공원에 같이 산책 나가자고 말해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센 척을 하며 살았던 건 아닌가 싶다. 실제로는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혼자서도 잘하는 척하며 감정이 메마른 채로 외롭게 지내온 건 아닐까 싶다. 나약함을 인정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소중한 사람에게는 의지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러면서 감정의 충만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더욱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 사실을 난 잘 모르고 살아왔다.
머리로는 몰랐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독립적인 인생이 미덕이라고 믿으면서도 A에게 먼저 다가갔으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의지할 친구가 필요해서 다가갔으니까. 아무리 혼자가 좋다고 해도, 때로는 마음을 공유할 누군가가 필요한 법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