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정돈과 통제 욕구의 관계

3. 정리하는 사람

by 빨간모자

어느 직장이든 책상 위에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일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내가 전에 일했던 직장에도 물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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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책상 위에 온갖 서류 더미들을 쌓아놓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A의 책상에는 업무지침서에, PPT자료에, 온갖 내부문서까지... 본인의 업무와 관련된 모든 서류들이 모니터 양 옆으로 늘 쌓여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물건이 항상 가득 차있었다. 게다가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파일과 폴더들을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두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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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B는 꼭 필요한 서류와 사무용품들만 책상 위에 올려놨었다. 수시로 정리를 했기 때문에 물건이 쌓여있을 틈이 없었다. 모든 물건들이 가지런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놓여 있었고, 컴퓨터 바탕화면 또한 파일들을 유형별로 정리를 해놓아서 늘 깔끔한 상태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B와 유사한 성격이다. 나의 모든 물건에는 고유의 '자리'가 존재한다. 서류들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그래서 바로바로 유사한 것들끼리 분류를 해서 정리를 해놓는다.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물건이나 서류들은 틈틈이 버리곤 한다. 사람이 업무를 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열 손가락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내 자리에 놓는 사무용품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류는 종이로 보관해봤자 볼 일이 자주 없다고 생각해서 컴퓨터에 파일로 보관해놓고 틈틈이 파쇄했다. 물질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다 보니 내 자리는 늘 휑하면서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예전엔 A처럼 물건을 쌓아놓고 정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A는 이따금씩 일하는 도중에 필요한 서류를 못 찾아서 서류뭉치를 뒤져가며 허둥지둥 대기도 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답답해하기도 했었다. 바탕화면에 있는 여러 파일들은 미로처럼 보여서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고, 볼 때마다 내가 폴더를 몇 개 만들어서 직접 정리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주변에서 정리 좀 하라고 잔소리하는 선배도 있었다. 하지만 A는 눈 앞에 닥친 업무를 처리하느라 매일매일 정신이 없었다. 책상 정리를 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정리는 통제 욕구와 관련이 있다. 정리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는 자리를 지정하기 위해, 두 번째로는 시각적으로 깔끔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물건마다 고유의 자리를 지정하는 행동은 자신이 물건을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필요할 때마다 쉽고 빠르게 해당 물건을 찾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자리를 지정해 놓고 기억해두면, 필요할 때 기억을 떠올려서 편하게 찾으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어디 있나 정신없이 뒤져보며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다. 물건의 위치를 통제함으로써 일상 속에서나 직장 내에서 생산성을 높이면서 심리적인 편안함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깔끔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공간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리를 차지하던 물건을 다른 물건과 함께 두거나, 버려서 빈 공간을 새로 만들면 그 빈 공간은 자신이 통제하는 공간이 된다. 빈 공간은 다른 물건을 둘 수 있는 장소이고, 이는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빈 공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이 공간을 통제한다는 쾌감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강한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정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빈 공간을 창출하려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통제 욕구도 적당해야 좋다. 최근에는 정리를 조금 강박적으로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정리를 잘하는 성격이지만, 요즘 들어 더욱 예민하게 하는 듯하다. 물건을 배치하는 데에 가끔씩 지나치게 집착하곤 한다. 가위 같은 사소한 물건 하나를 놓는 것도 어디에 놓을지 너무 골똘히 고민하고, 자리를 결정할 때마다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최근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을 자주 느끼게 되어서 발생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취준생이다 보니 취업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이유 없이 매우 불안하곤 한다. 어느 직장에 취업할지도 모르겠고, 어느 회사가 나에게 적합한 곳인지도 잘 모르겠다. 근시일 내에 취업이 가능한지도 불투명하다. 졸업이 코앞인데, 내년까지 백수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여러 주변인들의 시선도 쓸데없이 상상하게 돼서 괜히 괴롭다. 어딘가에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도 걱정이고, 내가 옳은 선택을 과연 할 수 있을까도 걱정이 된다. 걱정되고 불안한 게 한둘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이런 불안정성을 이겨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만족스러운 곳에 취업해 행복한 삶을 보내야 한다는 욕구가 마음속에 고착화된 듯하다. 이제까지 여러 실패와 불행에 중독되어 온 만큼, 반대로 성공과 행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집착이 통제 욕구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그러다 보니 '가위를 어디에 놓을까' 같이 쓸데없이 세세한 부분까지도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인생의 모든 부분을 내 맘대로 주무르겠다는 오만한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너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통통배의 노를 젓는 것이 인생이고, 자기 맘처럼 배가 쉽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머리로 아는 지식에 맞게 사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다.


요즘은 책상 위에 서류를 쌓아놓고 일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리를 조금 하지 않더라도 괜찮고, 삶의 모든 것들을 전부 통제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할 수도 없다는 깨달음을 실천해야겠다고 자주 다짐하고 있다. 내 주변 환경에 대해 조금씩 둔감해질 것이다. 그리고 취업, 돈 등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통제에도 조금씩 둔감해질 것이다.


오늘 TV를 틀고 채널을 돌리다가 '쥬라기 월드 1(2015)'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화 속 쥬라기 월드의 CEO인 사이먼 마스라니가 헬기를 운전하면서 했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09.jpg 쥬라기 월드(Jurassic World, 2015)
인생은 통제가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 행복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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