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나은 이름, 덜 나은 삶"
(최나은 시점)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
그건 내 이름의 뜻이었다.
아버지는 그 말속에 희망을 담았지만,
나는 그 말속에서 무게를 배웠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마다
아이들은 장난처럼 말했다.
“남보다 나은?”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나를 정의하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비교 속에서 자랐다.
점수, 외모, 친구 관계, 부모의 관심까지
모든 게 순위로 매겨지는 세상에서
나는 ‘덜 나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새벽은 늘 짠내가 났다.
어머니는 생선을 손질했고,
아버지는 손님에게 생선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 것도 싱싱해요.”
그 말이 우리 집의 ‘안녕’이자 ‘사랑해’였다.
나는 그 뜻을 몰랐다.
대신 이렇게 해석했다.
“공부라도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
식탁의 밥은 늘 혼자였고,
텔레비전 소리와 시장의 함성이 가족의 대화였다.
누군가 내 마음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묻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릴 적, 엄마는 늘 말했다.
“누가 벨 눌러도 문 열지 마. 모르는 사람은 무서운 거야.”
그 말은 나를 지키기 위한 당부였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주문이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문을 닫는 일이 익숙했고,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나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지 않았다.
“문 앞에 두고 가세요.”라는 말이 없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도
나는 불을 끄고 숨었다.
그렇게 닫힌 문은
점점 내 마음의 문이 되었다.
고2 겨울, 영화 〈콘택트〉를 보고 천문학자를 꿈꿨다.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그건 수학을 잘해야 해. 넌 문과잖아.”
그 말은 내 안의 별빛을 꺼뜨렸다.
그해 IMF가 터졌고,
시장은 얼어붙었다.
우리가 하던 생선가게도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트럭에 생선을 실어 날랐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셨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냄새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비린내보다 더 짠 냄새였다.
가족이 서로에게 미안해지는 냄새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대학 배치 결과가 나온 날,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지 않으셨다.
나중에 본 어머니의 일기에는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문장을 나는 오래 덮지 못했다.
입학 전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대학 가서도 같이 다니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친구는 말했다.
“이제 너는 나랑 안 맞아.”
그 말은 단 한 줄이었지만
세상의 구조가 전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보이지 않는 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학벌, 주소, 회사, 브랜드 —
사람을 나누는 선들이 내 마음에도 생겼다.
그 선 밖에서 나는 늘 조심스레 걸었다.
누군가 묻는 게 두려웠다.
“너, 어디 학교 나왔어?”
그 한마디가 또다시 문을 닫게 만들었다.
나는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사실 ‘남과 함께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린 나의 간절한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교 속에서 자랐지만,
비교를 넘어서는 사랑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은,
훗날 도현을 만나며 아주 잠시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