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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May 21. 2020

이 일이 인생에 쓰잘데없이 느껴질 때

그렇다면 지금도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지냈던 2018년, 10월로 넘어갈 때쯤 지독한 우울증과 향수병에 빠진 적이 있다. 햇빛이 보이지 않는 회색 하늘이 땅을 지배하는 날씨가 시작될 쯤이었고, 친했던 유학생 친구들이 제 나라로 돌아간 지 한 달이 됐을 때였다.


딱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외국어의 세계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모국어로 된 글을 읽을 때면 드디어 '나'로써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어떤 가면도, 노력도 필요 없었다.


샤이(shy)한 동양인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듣기 싫어 오버해가며 당당해져야 할 필요도, 이해되지 않는 농담 사이에서 억지로 웃을 필요도, 단어의 뉘앙스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사전을 펼쳐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기록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껴 조금씩 (일기가 아닌)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만 보는 일기장, 블로그, SNS에 순서대로 써보다 브런치에 정착(?)해서 쓰게 됐다. 읽는 사람이 늘어나고 글에 좋아요가 많아질수록 더 욕심이 생겼고 행복했다. 더 많이 읽고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자주 책상에 앉았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2018~2019년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2020년 올해에는 피아노를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 자체에 대한 목적보다는 내게는 미지였던 ‘음악'이라는 것에 도전장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이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건 누구나 알다시피 어렵다. 갑자기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고 클래식을 주야장천 듣고, 새로운 용어가 가득한 책을 펼쳐놓으면 흥미가 생기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게 뻔했다. 음악이라는 범주에 그런 식으로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피아노 배우기였다. 피아노가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배우기에 장벽이 높지 않으니까 말이다. 점차 내가 악기를 다루고 악보를 볼 수 있게 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생기고, 좋아하는 장르도, 작곡가도, 연주자도 생겨 음악에 흥미가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전 피아노를 시작했고 지금은 아주 피아노에 빠져있다. 예상대로 피아노에 빠지니 클래식이 좋아졌고, 곡의 의미와 음악사가 알고 싶어 졌고, 작곡가들의 생애도 궁금해져서 이제는 음악 책을 찾아다니게 됐다.


흥미로운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고, 공기를 채우는 음악을 들었다. 점점 더 읽기, 쓰기, 듣기라는 행위가 좋았다. 이 자유를 그 어떤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행복했다. 오늘 하루 만날 책과 음악이 기대돼서. 더 많이 만나고 싶어서.


하지만 그건 신기루였을까. 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을 향해 흩어졌다. 책 읽기가 밥을 먹여주나, 글을 끄적대는 내 모습을 남들에게도 내 자신에게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성인 다 돼서 피아노를 치고 음악사를 들춰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당장 먹고사는데 도움되는 일,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일, 스펙을 높이는 활동들을 해도 부족한 20대인데 나는 지금 이 무슨 돈 안 되는 일들에 빠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가. 이런 것들은 학생 때나 했어야 하는 일 같은데 다 큰 어른이 지금도 하고 있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분노와 우울이 테트리스 돌처럼 번갈아 내려왔다. 사회 탓으로 돌리는 건 싫었지만 나쁜 면만 부각하여 괜한 분풀이를 했다.(물론 속으로 나만 들리게 외쳤다.) 착실한 기계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혈안 되어있는 자본주의! 자꾸 남과 비교하여 개인의 가치를 등급화하는 사회! 돈 되는 게 아니라면 한심하듯이 보는 시선 철폐!


우울의 돌의 차례가 되면, 철이 아직도 안 들었다고, 제 하고 싶은 것이라는 이상을 보며 어리게 생각한다는 눈총을 쏟아내던 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눅이 들었다. (물론 나는, 어린 사람이 어리게 생각한다는 건 당연하다고, 오히려 극히 정상적이지 이상하거나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모두가 각자의 때가 있고 살면서 깨닫는 것이 다를 것이니까. 하지만 우울할 땐... 알면서도 세상의 모든 말이 다 상처다.)


그때부턴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불안했다.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고, 좋아하는 건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는 것과 음악 듣기 같은 것들 뿐인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하나 같이 다, 사회에서 밥 벌어먹는데 직접적인 요인이 되지 않는 것들인데, 이대로 가도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감긴 어둠은 책도 음악도 다 사치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영국에서 발견했던 그 우울의 우물이 다시 아른거렸다.


읽은 지 꽤 지난 손미나 작가의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손미나 작가는 아나운서 은퇴 후 파리로 넘어가 3년을 살며 소설을 집필하는데, 그 여정을 기록한 책이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이다. 나는 이 책을 외국 생활할 때 읽었는데, 책의 몇몇 생각 회로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었다.

시를 쓰면 행복하고, 그걸로 충분해요


"시를 쓴다고요?"

"네, 저는 시인이에요."

"어머! 근사하다. 그럼 시집도 발간했나요?"

"아뇨.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집을 발간하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잖아요. 난 그런 거 별로 상관 안 해요. 시를 쓰면 행복하고, 그걸로 충분해요."


"파리에 살다 보면 '나는 예술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난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문단 또는 화단에 등단했거나 이렇다 할 무대에 오르는 이들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당연히 품고 있는 예술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분출해 자기 삶과 버무리는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밥 벌어먹는 데 도움되는 일,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해 배우는 일을 떠나 그저 좋아하는 일을 가까이하는 것이 정말 사치일까. 그것을 사치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돈도 안 되는데 그런 거 왜 하냐고 묻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반문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권리가 있듯, 프랑스인들에게 예술은 지극히 당연하게, 또 자유롭게 누려야 하는 일이며 삶의 일부이고, 형식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건축가, 요리사 자격증에 도전하는 컨설턴트, 탭댄스 댄서로 활약하는 엔지니어. 그들 중 누구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이는 없다. 단지 자신 안에 내재된 예술의 열정을 마음껏 펼치며 창작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글을 쓰시는 모든 브런치 작가님들을 응원하고 존경한다. 브런치를 둘러볼 때면 작가님들의 열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마음이 벅차고 위로받는다.




저는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으면 합니다


어느 날 작가는 인터뷰 제안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만나게 된다. 손미나 작가와 베르베르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많이 관찰하고,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많이 써야 하지요.(중략) 마당에 씨를 뿌리면 어떤 것은 그냥 죽어버려도 어떤 것에서는 싹이 나고 꽃이 피기도 하잖아요. 글쓰기란 그런 것이죠."


"당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죠?"

"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으면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내게 주어진 것이나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다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멀리해야 하는 일이죠"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도 베르베르의 말과 함께 나 자신과 미래에 대해 상상을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나는 베르베르의 말에 100%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의 타협 자체가 나쁘다거나 거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과의 타협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고, 누구나 처한 상황이 다르고 심지어 내 상황조차 또 다르게 변할 것인데, 타협을 부정적으로 두고 봐야 하는지에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베르베르의 말을 보면서 나는 어떤 심지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 그 심지를 지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타협을 해야 한다면 그건 어느 정도까지 인가에 대해 다시 고민을 해본다. 어쩌면 이것은 베르베르의 말처럼 "끊임없이 반문"해야 하는 일 일거라고, 그런 점에서 내가 한 고민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위로도 같이 만들어낸다.


동시에, 나에 대해 고민하고 상하 곡선을 타는 일은 삶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것은 삶이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거라고 수정 가능한 결론을 내본다.




사실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워낙 유명해서 도서관에서도 몇 번 봤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책이다. 나 같은 경우 외국(특히 유럽)을 유토피아적으로 그려놓은 글이나 그를 키워드로 해서 한국을 비판하고 외국의 좋은 면을 부각해 무작정 좋게 포장하는 것에 경계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의 첫 번째로는 대부분 그런 것들이 다른 세상에 대한 어떤 '환상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기 쉽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어떤 한 면을 보고 옳고 좋은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사방에서 작용하는 각 나라의 정서 및 역사와 상황과 같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을 잘 고려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어느 날 E-book 으로까지 마주치게 되어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를 시작했고, 경계의 자세를 늦추지 않고 읽었다. 결론적으로 경계의 자세를 (아주 조금이라도) 갖추고 읽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가 파리 생활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쓴 건 아니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좋은 면이 주로 나온 파리 사람들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자책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면은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보지만, 좋은 면'만'을 보고 환상을 갖거나 자책하는 것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바이다.


어쨌건 저쨌건, 그런 것 다 떠나서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재밌고 신나는 책이었다. 나는 손미나 작가의 자유로움과 떠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열정이 부러웠고 그 모습을 읽는 순간 행복했다.  내 삶이 갇힌 것 같고 사회에 속박된 기계같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쳐볼 것 같다.

아름다웠던 파리의 한 여름날

(사실 나는 이 책 이후로 작가님의 소박한 팬이 됐다. 작가님이야 말로 베르베르의 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분이신 것 같다.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열성이 어디서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건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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