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 씨는 생애 첫 10년 중, 꽤 많은 시간을 친할머니와 보냈다. 할머니 성자는 충남 아산시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시 성거읍 시구리 마을로 시집왔다. 그때가 1970년쯤이다. 곧 아들 상구가 태어났고, 25년 뒤에는 손녀 지 씨가 태어났다.
지 씨는 그 마을에서 고추장과 김치랑만 밥 먹는 법, 청국장 먹는 법, 경부고속도로 옆에서 포도 파는 법, 맛없는 포도 골라내는 법을 배웠다. 여름이면 천장에 달린 선풍기, 안방에서 꺼내 온 선풍기 한 대로 땀을 말리며 포도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할머니는 포도로 포도주도 만들고, 포도 증류주도 만들었다. 5년, 10년씩 묵혀두기도 했는데, 이는 지인이나 친척들이 맛있다고 돈 주고 사갔다.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손주들은 커다란 거봉이 먹기도 불편하고 씹다 보면 즙이 자꾸 입술 사이로 흘러내려, 캠벨포도를 더 선호했다. 다만 지 씨는 그중에 장녀였으므로, 어른답게 거봉포도를 좋아해야 한다는 묘한 허세에 이끌려 거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첫째니 어른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애들이 하는 것이라면 다 싫어하고 봤던 기억이 있다. 분홍색이나 파란색이 아닌, 하얀색과 보라색을 좋아했고, 청국장을 좋아했고, 김치를 좋아했다. 그런 지 씨를 할머니는 애늙은이라고 하면서도 가장 좋아했다. 지 씨는 할머니가 애늙은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물으면서 쭈굴쭈굴한 애호박을 떠올렸다.
지 씨가 학교에 가고, 천안 시내로 이사 가면서부터는 시구리 마을에 자주 가지 않았다. 학원에 갔기 때문이고, 친구들과 놀아야 했기 때문이고, 시구리 마을에 가려면 하루에 2번밖에 안 다니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맘때쯤부터 지 씨와 할머니 성자, 시구리마을, 거봉포도의 추억은 멈추었다.
17년 정도가 희미하게 잔잔히 흘렀다. 성자는 늙은 몸으로 살다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다. 지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난 17년을 후회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후회했다.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했다. 기억나지 않던 온갖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또 그냥 모든 걸 후회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빈 집에 아빠 상구와 엄마 초희가 들어가 산다고, 집과 마당 정비를 시작했다. 집에는 할머니가 심은 파, 담가둔 포도주, 그 옆에 정리되지 않은 소쿠리, 꽉 찬 항아리 몇 개가 남아있었다. 아마 돌아올 줄 알았겠지. 지난주 토요일엔 이 싸도 시구리 마을에 가 집을 돌보고 동네를 돌았다. 할머니가 일궜던 밭, 논을 갔다. 옆 밭주인과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에 대한 말도 나누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네의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나며 손길이 적어진 곳곳이 떠올랐다. 거봉포도가 아닌 유행인 샤인머스캣 밭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제 삶을 마쳐 떠나고 있는 마을을 그냥 두면 안 되지 않을까. 이 동네에서 살아온 이들, 일궈낸 밭, 고된 농사로 지켜 온 거봉포도, 함께 만들던 포도주 이야기와 문화가 사라지게 두면 안 되지 않을까. 시구리 마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