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나는 내년 7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오토데스크 본사에서 Senior Financial Analyst로 근무하기로 결정됐다.
미국에서는 기업의 입사 제안서를 일반적으로 Offer Letter오퍼 레터라고 부른다. 서류전형과 인터뷰를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채용을 결정한 기업은 오퍼 레터를 통해 합격을 알리고 간략한 고용조건을 제안한다. 상세한 내용은 여러 부록 서류 형태로 주어진다.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오퍼 레터에 기재돼 있다고 보면 된다.
오퍼 레터는 통보가 아니라 제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회사에서 제안한 연봉이나 직급, 각종 복지혜택을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받아들여 서명해버리면 호구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협상이 일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협상 시도를 고려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만 손해다. 협상은 나뿐 아니라 회사 측에도 득이 되는 행위라고 믿어야 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회사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퍼 레터에는 대략 이런 내용들이 담긴다:
- 입사 예정일
- 근무지역
- 연봉 (기본급)
- 보너스 조건
- 사이닝 보너스
- 정착비/이사비 지원
- 스탁옵션/자사주 지급
- 휴가일수
- 의료/치과/안과 보험 조건
- 계약 해지 조건
제일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역시 돈이다. 기본급부터 시작해서 자사주까지 내가 받을 임금 총액을 확인하고, 어떻게 협상에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협상이 필요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협상은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입사 뒤에 자기와 똑같은 직급과 경력을 가지고 입사한 동료가 자기보다 수 천만 원 더 많은 스탁옵션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른다. 후회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다.
기본급은 근무 지역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미국은 지역별로 주거비와 세금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내 근로계약 조건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나처럼 MBA 졸업 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본급은 10만 달러 대 초반 수준이다. 컨설팅이나 투자은행은 3-5만 달러 더 준다. 그런데 근무지가 물가가 싸고 주(State) 세금이 없는 워싱턴(시애틀 등)이나 텍사스라면 2-3만 달러 깎이게 된다. 물가 차이를 반영해서 비슷한 구매력에 해당하는 봉급을 주는 것이다.
보너스는 회사나 업계마다 케바케로 보는 게 좋겠다. 기본급 연봉의 10-20% 정도가 보통이지 않나 싶다. 여기서도 컨설팅과 투자은행은 별개다. 투자은행은 보너스를 연봉만큼 받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건 개인적 성과보다는 매해 경기와 더 관련 깊은 것으로 보인다.
사이닝 보너스는 축하금에 해당한다. 새로 입사하기로 오퍼 레터에 사인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주는 보너스다. 다른 시각에서 계약금으로 볼 수도 있는다. 직원 측에서 입사를 포기하면 다시 회사로 돌려줘야 하는 돈이기 때문이다. MBA 졸업생 기준으로 사이닝 보너스는 0-5만 달러 사이가 보통이다. 안 주는 회사도 있고 화끈하게 5천만 원을 제시하는 회사도 있다.
정착비/이사비는 미국이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생긴 특이한 복지혜택이다. 거의 다른 나라로의 이민에 맞먹는 이동이 흔하다 보니 관련된 비용을 어느 정도 회사 측에서 부담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해야 하는 경우 직접 운전해서 가기 어렵다. 차를 트럭에 실어서 옮겨주는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 보통 1천 달러에서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다. 나도 지금 동부에서 차를 굴리고 있으니까, 내년 여름에 1천 달러 넘는 돈을 들여 차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야 한다. 업계 평균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우리 회사의 경우 이동 거리에 따라 1-2만 달러 이상 이사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 가족 구성원이 더 많으면 지원액은 올라간다.
스탁옵션/자사주 지급은 미국 회사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특히 테크 기업들의 경우 주가가 중장기적으로 많이 올라왔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아주 큰 동기부여가 된다. 운이 좋으면 연봉 이상으로 주식에서 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이 부분을 회사 측과 협상하는데 집중했다. 보통 기본급은 직급별로 평준화돼 있어서 협상의 여지가 많지 않다. 한국에서 같은 대리에게 누구는 5천만 원 누구는 8천만 원 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반면에 주식이나 옵션의 경우 일회성 비용이고 그래서 협상의 여지가 더 많다. 회사 측에서 꼭 잡고 싶은 직원이라면 한 번 몇 천만 원 더 선심 쓴다고 해서 큰 일도 아니다. 또 직원들 사이에서 직접 비교 대상이 되는 숫자가 아니다 보니 더 유동적이다. 내 경우 MBA 협상 수업을 듣고 연습한 경험을 토대로 자사주 지급 금액을 4천만 원 이상 높이는 데 성공했다.
내 경우 휴가 일수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근로계약서에 휴가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HR에 따로 문의했더니, 그냥 매니저와 상의해서 필요에 따라 휴가를 가면 된단다. 기안을 올리고 결제를 받는 절차 따위도 없다. 최대 휴가일수 같은 제한도 없다. 책임감을 가지고 일과 휴가를 알아서 조정하라는 것이다. 바람직한 제도 같기는 한데 실제로 1년에 직원들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휴가를 보내는지 궁금하다. 이건 팀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다를 것이다.
미국은 의료보험이 일반의료/치과/안과로 쪼개져 있다. 이걸 다 들어주는 회사도 있고 아닌 회사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직원들에 일괄적으로 같은 보험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최소 보장은 회사 측에서 100% 보험료를 부담해 주지만, 더 많은 보장을 선택하고 차액을 내가 추가로 지불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망보험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1억짜리 사망보험을 들어주지만, 내가 원하면 추가 보험료를 지불하고 5억짜리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식이다. 미국은 보험료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렇게 보험 지원을 받는 것만 해도 연봉 몇 천만 원 더 받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아내와 아이까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어 더욱 그렇다.
계약 해지 조건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이렇게 쓰인 게 전부다.
"회사는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당신을 즉시 해고할 수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직원 해고 프로세스에 대해서 글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deolu Eletu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