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록 나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록 Nov 22. 2020

문장이 향하는 곳

고민의 문장과 안미옥의 시


고민한 흔적이 없는 문장은 이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미에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문장, 솔직함을 가장해서 흉포함을 담은 문장. 자신을 없앤 채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는 문장. 발화의 위계를 고려하지 않는 문장. 말과 말 사이, 말하기와 듣기 사이, 심지어 자신과 자신의 말 사이에도 존재하는 위계를 느끼지 못하는 문장. 말이 태어난 원천을 기억하지 못하는 문장. 따라서 모든 문장은 바깥으로 향하는 동시에 자신으로 닿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문장을 읽는 일은 차라리 투쟁에 가깝다. 그 세계에서 다원성과, 소수성과, 약간의 나를 지키려는 싸움. 아니, 그런 문장을 읽지 않는 일도 결국 투쟁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은 그런 몰개념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멀쩡히 그걸 알면서도 천연덕스레 웃으며. 그런 점에서 나는 위계의 기득권이다.     


대개는 자신이 가진 지위나 권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세계를 단정한다. 자신 역시 위계의 상층부임에도, 더 거대하고 근원적인 문제에 맞서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런 자전적 문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겸손한 척 늘어놓지만, 말하기에 취한 나머지 자신의 태생적 조건을 간과한다. 모든 것은 각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간단한 맥락마저도 살피지 않은 채. 비극이자 소극이다, 참으로.






파고     


두 손은 먼 곳에 있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다. 슬픔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슬픔이 숲에 가득 찬다. 숲을 보고 있다. 거대한 바위를 보고 있다. 바위 속에 있는 바위를. 바위 속에 있는 슬픔을. 씨앗을 꺼내려면 열매를 부숴야 한다.     


웅크리고 앉아서 뭐 하고 있어?

그냥 혼자 있어요.     


우리가 자주 하던 말

우리가 자주 듣던 말     


너의 눈빛은 돌 같아. 바위 같아. 그 안이 다 보인다. 집 안에서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흠뻑 저은 내가 너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라서 시체가 될까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열차는 제시간에 맞춰 출발한다.

열차가 지나가면 우리도 지나갈 수 있겠지

각자의 목적지로, 반대 방향으로.     


_안미옥, <온> 중

매거진의 이전글 노동과 예술을 살아내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