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up of Coffee 1

기억에 남는 커피 한잔

by DukeRattler

일병 때였을까, 아니면 상병이었을까. 터미널에서부터 저벅저벅 한걸음마다 무거워지는 전투화와 어둑한 골목이 괜스레 익숙했던 것 같으니 아마 상병이었겠지. 머피의 법칙이란 참 애석하게도 시간을 딱 맞춰서 집을 나서면 교통정체를 만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일찌감치 집을 나서면 사실 날개가 달린 자동차는 이미 개발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해버리고는 한다. 그날은 정확히 후자였다. 일분일초라도 내가 '상병'임을 잊고 바깥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무색하게 버스는 나를 떨궈놓고 발걸음도 가볍게 달려가버리고, 나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떼어지지 않는 발바닥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도 걸어보고, 이유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다 새삼스럽게도 어색한 매점이 있으면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국경이라도 넘는 듯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는 그날따라 유난히 짧아서 이대로 가다간 나는 날숨을 전부 한숨으로 쉬어버리는 경지에 이를 듯하였다. 하필 비는 또 추적추적 오기 시작해 점점 진하게 물들어가는 전투복은 안 그래도 무거운 발걸음에 족쇄를 달아주었다.


그렇게 한걸음에 한숨 한 번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걷다 보니 문득 지난 적 없는 골목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다. 거리 감각이 무딘 편인 탓도 있지만 워낙에 그 거리가 그 거리처럼 보이는 동네이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방향적으로는 대충 맞으니 굳이 돌아서 갈 필요도 없고 틀린 길도 아닌걸. 어둑한 거리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처음 보는 거리의 처음 보는 카페였다. 그러고 보니 그럭저럭 비도 맞은 데다 날씨도 쌀쌀해서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 것 같다. 시간도 아직 한참 남았겠다 커피나 한잔 마시고 들어가야지.


일단 기억에 남는 것은 카페 조명이 유난히 밝아서 깜깜한 거리에서도 빨간 페인트칠이 눈에 띌 정도였다는 것. 그리고 들어가자 주인장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굉장히, 어쩌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게 인사를 건네며 친절했다는 것. 이제 전역한 입장에선 나도 현역인 친구들을 보면 괜히 애틋하고 그러니 같은 마음이셨을까. 안타깝게도 커피는 여느 카페처럼 아메리카노 기반의 평범한 메뉴들 뿐이었다. 그럼 어때. 비에 젖은 몸을 데워줄 따뜻한 커피에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은 부대 안에서는 즐기기 힘든 것들이니까. 적당히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젊은 남성은 여전히 만연한 미소와 함께 주문을 받았다.


다시 한번 주인장은 활짝 웃으며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커피를 가져다줬다. 이쯤 되면 내가 커피를 시켰는지 스마일을 시켰는지 좀 헷갈린다. 커피는 따뜻했다. 맛이 끝내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카페란 의외로 찾기가 힘들다. 오래된 원두를 쓰는 것이 너무 티 나는 텁텁한 맛만 아니라면, 따뜻함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차가운 아아: 당연한 소리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메리카노에 대한 내 기대치는 딱 그 정도이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놀랍게도 복귀하는 군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지간히 일찍 왔거나 어지간히 길을 잘못 들었나 보다. 뭐 덕분에 시간은 여전히 여유로우니 상관없나. 또 한 모금. 비가 오는 날에는 전투화가 참 좋다. 물 튈 걱정, 양말 젖을 걱정 없이 그냥 마냥 저벅저벅 걸어 다니기에 참 좋다. 또 한 모금. 카페도 따뜻하고 뜨거운 커피까지 마시니 약간 더운 것도 같다. 아직은 아아의 계절인가. 또 한 모금.


커피를 한 모금 삼킬 때마다 생각도 같이 삼켰다. 한숨도 삼키고, 아쉬움도 삼키고, 전부 다 삼켜버리자 따뜻함만 남았다. 심지어 좀 더웠다 정말. 후. 이렇게 더워지면 여전히 흩날리는 빗방울과 찬바람을 좀 맞아도 괜찮지 싶다. 그럼 나가볼까.


여전히 카페 조명만큼이나 밝게 웃는 주인장과 빨간 페인트가 강렬한 카페를 뒤로하며 나는 그닥 특별하지도 않았던 이 커피 한잔이 왠지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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