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기억만 떠올라도 내게 그 도시는 성공적이다
아침 일곱 시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경북 예천 터미널까지 정확히 2시간 30분이 걸렸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 것인지, 소요 예정시간을 정확히 맞췄다. 이른 시각 이어서일까. 버스 안에는 운전기사님을 포함해 나까지 세명뿐이다. 이틀 전 스마트폰 앱으로 예매했을 때 내가 첫 번 째였다. 버스 탑승객이 한 명뿐이라서 혹시나 버스 운행이 취소될까 봐 걱정을 했더랬다. 좌석은 오른쪽 맨 앞자리다. 넓은 앞유리를 시원하게 내다보며 고속도로 드라이브를 즐길 셈이었다. 어차피 혼자 가는 출장, 즐겁게 가야지.
금요일 당일 출장이라 시간이 빠듯했다. 오전 아홉 시 반에 목적지에 도착해 바로 업무를 진행했다. 업무가 끝나니 오후 두 시. 업무를 마저 마치고 홀가분하게 식사하고자 점심시간이 늦어졌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시간까지 두어 시간 정도 남았다.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면 딱 맞을 여유다.
평일 오후의 예천은 역시나 한가롭다
이러면 밥 먹을 곳을 찾는 게 일이다
일단 읍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둘러보면 뭐라도 보이겠지. 굳이 검색을 하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읍내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걷다가 먹거리 골목을 돌고, 시장 골목까지 훑었다. 조용하다. 시장은 문을 연 것인지 닫은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다. 골목에도 인적이 드물다. 내가 식사 때를 지나쳐서 그런 것이겠지. 식당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에 형광등이 켜 있다. 문을 열긴 했네. 하지만 손님이 없는 식당에는 발길이 내키지 않았다.
마치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속 이노가시라 아저씨처럼 식당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이 식당을 가는게 맞는지 또 이 메뉴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인지 스스로 논리를 펼치며 신중함을 만들었다. 겨우 점심 한 끼 하는 것 가지고.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게다가 다시 또 언제 올지 모를 곳에서, 특별함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억에 남을 메뉴를 먹어야겠다.
문득 국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터서 걸터 얹어 만든 솥에서 펄펄 끓는 김이 올라온다. 이내 주인 아주머니가 토렴을 한다. 그 모습이 나를 끌어당겼다.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가게 밖 배너에 보이는 국밥 사진에 선지가 보인다. 메뉴는 딱 한 가지. 선지국밥이다. 매력적이다. 식당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야.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헐. 테이블은 손님들로 가득찼다. 이 동네 주민들은 모두 이곳에 모인 모양이다. 자리가 없다. 밖은 정말 한적했는데 말이다. 시계는 두시가 넘었다고 알려주고 있는데, 앉을 곳이 없다. 나가서 기다려야 할지, 다른 식당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찰나 주인아저씨가 저 쪽으로 앉으라고 한다. 가리키는 테이블을 보니 아저씨 혼자 식사를 하고 있다. 합석.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해보는 합석이다. 식사 중인 아저씨에게 자리에 앉겠다고 가볍게 목례하며 실례를 구했다.
개의치 않는 아저씨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앉았더니, 밑반찬이 나온다.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이윽고 국밥 등장. 냄새가 기가 막혔다. 맛은 육개장스러웠고, 큼직한 선지는 생각보다 많이 들어있었다. 국밥 가격이 6천 원이라는 점은 저렴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서울에서는 이 가격에 이 정도 음식을 맛보기 힘들다. 따뜻한 생선구이와 호박전, 멸치볶음과 밑반찬. 부족함이 없다. 지방의 매력이면서 예천의 좋은 이미지다.
음식 하나로 그 도시의 이미지가 새로 다가온다
인심 좋은 식당이야말로 훌륭한 홍보대사다
식사를 마치고 예천 남산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지만 스카이라인이 낮은 예천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버스 출발시각까지 조금 여유 있어 한천을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따뜻한 햇살이 조금 걷자 덥게 느껴진다. 한천이라고 이름 붙인 하천은 잘 정비된 모습이다. 예천읍이 예천군의 군청 소재지이니까 아무래도 다른 읍면보다는 다르겠지. 꽤 만족스러운 식사, 봄기운 가득한 산책까지 출장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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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천 하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근처 도시들은 저마다 특산품도 있고 유명한 장소라든지 등등 나름대로 떠오르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예천은 딱히 특별함이 없다. 하지만 특별함이 만족감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맛있었던 국밥 한 그릇, 개나리 핀 산책로 만으로도 큰 도시 못지않은 호감을 가질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점심에 찾아간 그 국밥집은 예천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식당이었다. 이제는 예천 하면 국밥집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