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에서 나와 불속으로?! 01.
영어 속담 중에서 ‘Out of the frying pan and into the fire'라는 말이 매우 익살스럽기도 하고 강렬해서 한 번 듣고 기억에 남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오히려 더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내가 심각한 번아웃을 못 견디고 사표를 던질 때까지만 해도 나는 프라이팬에서 나와서 안락한 소파로 옮겨갈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번아웃은 근무 14년 차에 찾아왔다. 13년 근무하는 사이에도 흔히 말하는 3, 6, 9, 12개월마다 소소한 권태를 느끼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들이 지겹기도 했지만, 그저 가벼운 감기 같이 금세 사라지곤 했다. 내가 하는 일에 큰 보람과 재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4년 차에 접어들 때에는 아주 독한 독감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동안의 권태와는 뭐가 다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13년을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퇴사를 하면서, “나는 60살 될 때까지도 계속 일하고 싶은데,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는 말을 남기며 떠났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스스로가 안정적인 밥벌이에 길들여져서 도전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조급한 마음도 생기고 뭔가 미래는 좀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쪼개어 이런저런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영역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근사한 자격증을 취득해서,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 경제적으로도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코치 자격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코칭 철학과 윤리, 코칭 스킬들을 배우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특히,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전인적인 온전한 인간이다’라는 코칭철학은 답정너 상사에게 숨 막혀했던 나에게 오아시스 같은 말들이었다. 코칭의 매력에 흠뻑 빠져 평일 점심시간과 주말을 할애하며 5주 만에 실습시간 50시간을 채워내고, 무서운 속도로 스킬들을 흡수해 나갔다. 멘토 코치님들께서 그동안 가르쳤던 수강생 중에서 가장 단기간에 첫 번째 자격증(KAC)을 취득한 사람이라며 칭찬하시는 말씀에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칭을 배우면 배울수록 지식은 충만해지는데 마음은 공허해졌다. 마치 몸에 좋은 약을 먹으면, 처음에는 두드러기가 나고 부작용이 올라오는 것(장기간에 걸쳐 나빠진 건강이 호전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명현반응’)처럼 현실에 대한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온갖 불평, 불만, 불안이 마음속에서 티격태격 싸움을 해서 불면증도 생기고 힘들었다. 항상 긍정적이고 작은 것에도 만족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들끓어 오르는 불평과 불만이 때로는 목구멍의 통제를 뚫고 불쑥 밖으로 튕겨져 나오기도 했다. 잠을 청해 보아도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마치 컴퓨터를 끄려고 하면 할수록 재부팅이 되면서 나를 약 올리는 기분이랄까? 어떤 날은 잠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침대에 눕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다가 우두커니 앉아서 결국 새벽녘이 되기도 했다.
나의 상태와 상황은 아무 문제 없이 양호해 보이는데 뭐가 문제인 거냐고 주위 사람들은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불만족스럽고 불안했다. 위아래로 치이고 끼어 있는 중간관리자로서의 애환이 있었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복잡 다양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요청에 응대해야 하는 피로감이 누적되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지쳐 있었는데 그걸 못 알아차려서(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지친 스스로를 오히려 더 다그치고 있어서 몸이 보내주는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특강에서 ‘예전에는 재미도 느꼈고 잘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인데,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재미를 느낄 수 없다면 번아웃 증상으로 보인다’라는 말을 듣고 딱 내 얘기구나 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적당한 타이밍에 놓아주어야 탄성이 유지되는데,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어느 순간에는 늘어져버리는 것처럼. 회사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챙겨야 하는 여러 일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난관에 봉착한 일들, 여러 긴장 요소들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낸 몸에 무리를 주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불평, 불만, 불안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인이자 변화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악역을 자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하고 친절해지기 위해 사표를 썼다. 일단 잘 쉬고 에너지가 다시 생기게 되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다시 노력하게 하는 힘으로 또 다른 지향점을 찾아 한 발을 내딛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