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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맘 Nov 03. 2018

지켜봐 주는 그 이름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바로 그거였어. 소위 '정신적인 안정감'이 가장 아쉽더군. 가족이 거기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정신적인 안정감'이지. 가족 말고는 그 무엇도 그걸 줄 순 없어. 돈도. 명예도.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하는 화요일’ 중에서-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아침 등교 시간은 더 빨라졌고, 엄마는 새벽 7시 반에 아침을 차려주었다. 늦게 일어난 날은 세수만 하고 허겁지겁 교복을 챙겨 나갈 때도, 식탁에는 늘 따뜻한 하얀 밥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국과 김치가 놓여있었다.

그날도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지그시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길이 느껴졌다.    


“엄마, 왜 자꾸 쳐다봐?!”     


나는 볼멘소리를 하며 한 숟가락 먹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엄마의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리면 바로 책상에 엎드려 자는척하거나, 침대에 누워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덮었다.

방 저편에서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그날의 공부는 그 시점에서 끝이 났다.


그 당시에는 나를 지켜보는 엄마의 관심과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그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예민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나는 매일 속으로 외쳤다.    


‘제발 그만 좀 쳐다보세요. 꽁꽁 숨어버리고 싶어요.’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 노래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있었고

넌 항상 어린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 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주겠니


엄마가 사춘기 딸아이에게 전하는 가사 중 일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4년이 흐른 지금, 딸아이를 지그시 쳐다보며 ‘공부해라’라는 양희은의 가사를 듣는 순간, 그 한마디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 시절 엄마에게 가장 듣기 싫은 ‘공부해라’라는 그 소리가 지금에서야 칼날에 가슴을 베인 듯 아련하게 들려왔다.


딸아이가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가슴속을 뒤져 내뱉은 첫 마디가 ‘공부해라’ 였다니.

속으로는 너무 교과서 같은 말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밥을 먹을 때 쳐다보는 엄마의 시선에서 사춘기 딸은 ‘밥을 챙겨 먹어야 공부할 힘이 나지’라고 생각하는 엄마를 느꼈고, 방에서 내가 무얼 하는지 가끔씩 노크를 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사춘기 딸은 ‘얘가 공부를 잘하고 있나’라고 감시하는 엄마를 느꼈다.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나를 향한 엄마의 모든 시선은 ‘공부’ 하나로 압축되었었다. 설령 ‘공부해라’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그 말속에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과 염원이 들어 있다는 것도 엄마가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았다.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토록 원했었던 엄마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내 마음 한켠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었다.

더이상 나를 지켜봐 주는 존재가 없어진 것이다. 그 불안감은 상실감과 함께 때때로 나를 찾아왔다.
채워졌을 때는 몰랐지만 비워지고 나서야 그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과 관심으로 누군가를 지켜봐 주는 존재는 ‘엄마’ 라는걸.       


나의 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노는 와중에도 한 번씩 나에게 와서 이야기한다.    


“엄마, 이것 좀 봐봐.”

“엄마, 나 좀 봐봐.”     


올해 세살인 막둥이도 혀 짧은 목소리로 언니 오빠가 말하는 것을 따라 한다.    


“음마, 바바랑.”    


아이들도 엄마가 지켜보고 있을 때 행복을 느끼나 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크면 엄마의 시선을 귀찮아할 때가 오겠지만(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가 되면 더 멀리 떨어져 아이들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겠지.    


“얘들아, 엄마가 여기서 항상 지켜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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