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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해공 Dec 10. 2020

내가 단어를 수집하는 이유

프롤로그

 나는 실직자입니다. 8개월 전까지는 광고대행사에 다녔고, 13년 차 카피라이터였죠.

내가 하던 일은 소비자의 마음에 광고주의 상품이 쏙 들어가도록 매력적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15초 혹은 30초짜리 영상 아이디어를 구성하고, 펀치를 날려줄 심플하고 강력한 문장(Key Copy)을 뽑아내는 것. 소비자라는 물고기를 낚을 예리한 바늘과 떡밥을 준비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의 특성 때문에 나는 365일 내내 단어들과 붙어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단어를 써야 매력적으로 들릴까?', '어떻게 에둘러 말해야 심의를 비껴갈까?', '익숙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표현은 없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짰습니다.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작업은 기계적으로 진행되었고, 내게서 나오는 문장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식상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관성대로 출퇴근을 반복하던 어느 날, 나는 회사를 나와야만 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육 떨림이 종아리부터 시작해 엉덩이, 배, 등, 얼굴까지 타고 올라오더니 급기야 손가락까지 떨리더군요. 시도 때도 없이 부르르 떨리는 몸으로 야근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결국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나온 후, 완전한 쉼의 상태로 들어오니 참 좋더군요. 바쁘게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낮의 햇살이 주는 여유로움, 함께 사는 가족의 따뜻함,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의 유쾌함, 매일 마주치는 이웃집 아저씨의 친절함... 꽤 오랫동안 유기해버렸던 작고 소중한 행복들. (그런 행복을 되찾고 나니 아팠던 몸이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조용히 내 곁을 지켜온 행복을 발견하고부터 나는 '오늘의 단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 하루 동안 인상적이었던 사건과 만남, 사람을 떠올리며 그것들이 내게 준 의미가 무엇인지 반추합니다. 둘, 반추하다 보면 하나의 단어가 의식 위로 떠오릅니다. 떠오른 단어가 주는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 밑에 일기 형태로 짤막하게 기록합니다. 셋. 매일매일 오늘의 단어를 기록하고 수집해나갑니다. 이렇게 하나둘 모아진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나의 의식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가치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땐 단어를 공공재처럼 대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범용적인 의미를 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단어는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지극히 사적인 암호이자 나만의 크리에이티브입니다. 생각의 재산이 되는 거죠. 그래서 나는 단어를 수집하는 일을 계속해나가고 싶습니다.

 

 이곳에 연재하는 오늘의 단어들은 어쩌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바라봅니다. 단어라는 문을 통해 당신 또한 일상의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희미해져 가는 모든 것들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단어를 수집하는 일은 행복을 쌓는 일이라는 걸, 모든 독자 여러분이 느끼게 되길 바라며.


2020년의 끝자락에서 육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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