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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품쟁이 May 20. 2020

[3화] 난 슬플 때 학춤을 춰

그럼 잊을 수 있을까 

뇌를 클라우드에 저장할 수 있다면 삭제하고 싶은 파일이 얼마나 될까. 휴지통에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삭제까지 하고 싶은 흑역사 말이다. 이런 건 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지, 사랑도 아닌 것이 왜 예고도 없이 찾아와 머릿속을 떠도는지 모르겠다. 아... 생각해보니 날씨 탓이로구나. 나른한 봄햇살과 솜사탕 같은 구름과 흩날리는 꽃가루... 삼박자가 갖춰지니 그날의 기억이 자동 재생된다.   


오래전 이맘때, 나는 교양을 쌓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명색이 교양작가인데 교양이란 걸 좀 갖춰야 하지 않나 싶었고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첫 번째는 교양 있는 사람들 만나기. 나와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뭔가 특별한 교양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예상대로 그들의 전문지식은 감탄스러웠고 톤 앤 매너는 감동적이었다. 필드용 맥사는 7:3 등산용 막사는 6:4 회식용 소맥사는 1:1:2 특별한 날엔 앱솔루트에 주스. 이전까지 한 종류만 올곧게 마시던 내게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고 (술)자리란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예의와 의리를 알려줬다. 나는 그들을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났고,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까지 마시고 집에 들어갔는데 현관에서 출근하던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가 말했다. "일찍 나가네?" "어, 오늘 녹화야." 나는 그대로 다시 나갔다.


참으로 즐겁긴 했으나 수면 부족, 기억력 감퇴, 체력 고갈 등 부작용에 시달린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책에 담겨있다 하지 않던가. 폭넓은 교양을 쌓기 위해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정치, 사회, 인문, 소설, 철학... 다양하게 읽기 위해 다양한 책을 사댔고 덕분에 인터넷서점 골드회원이 됐으며 나의 작고 낡은 방은 헌책방 같아 보이기에 이르렀다. 내 몸무게도 거뜬할 합판 선반이 책 무게에 휘어지는 걸 보면서 아, 나는 뿌듯함을 느꼈던가. '이제 나는 지식인이야!'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놀러 왔다. "요즘 책 프로 하냐?" "아니. 내가 읽은 거야.(후훗)" "오~ 저건 무슨 책이야?" "저거?"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예전에 읽은 건데 별로야." 저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일단 모면했다. "그럼 이건?" 그날따라 지적 호기심이 샘솟은 친구는 내 책들을 찬찬히 꺼내보며 천천히 질문했고 나는 묵묵히 책만 바라봤다. '알콜 때문일 거야. 그동안 너무 많이 마셔서 뇌가 술에 절은 거야. 내가 기억 못할리 없어...' 친구는 제일 두꺼워 보이는 책을 집었다. "야, 라면이나 먹자." 라면받침이 된 그 책은 아마도 가장 최근에 산 책이었다.


그럴듯해 보였으나 허세, 좌절, 자책 등 부작용에 시달린 나는 평소처럼 살기로 했다. 멀리 가서 찾지 말고 괜한 짓 하지 말고 내 일 열심히 하다 보면 없던 교양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운 좋게도 얼마 후 나는 문화 프로를 맡게 됐고 소설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을 잔뜩 만나게 됐다. 어린왕자 같은 분들이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해맑게 물으실 때 맑게 대답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 세상에 쓸데없는 지식은 없다. 나는 즐겁게 소맥을 만들고 어설프지만 책을 읊으며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어떤 영화감독님과 친해지게 됐다. 

그는 본인이 만든 코믹영화 보다 더 유쾌하고 재미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훑는데 이건 노벨문학상 감이었다. 이 분의 차기작은 무조건 천만 영화야! 느낌이 왔다. 어떻게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려나 하던 어느 날, 감독님이 녹화 끝나고 조용히 나를 불렀다. 우리는 방송국 돌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햇살은 따사로웠고 돌계단은 따듯했다.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어디선가 흩날리는 꽃가루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졸린 건지 졸은 건지 멍하니 하늘 보며 앉아있었던 거 같다.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던 감독님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혹시 송골매 좋아해?" "네?" "내가 송골매로 뭘 해볼까 하는데 관심 있나 해서." 

뜻밖이었다. 코믹영화 아니라 송골매? 아무렴 어떠랴. 콩고물이 내 눈 앞에 있는데! 목소리가 한 톤 업됐다. "어머, 송골매 좋아하죠! 자연 다큐 하시게요?" 그 순간, 나와 그 사이에 아주 짧지만 강렬한 정적이 흘렀다. 감독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돌계단이 더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 이런 얘긴 안에 들어가서 시원하게...' 하지만 그는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는 뒤늦게 알았다. 송골매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전설의 록밴드였다는 것을.    


아, 내 눈가가 붉어진 건 미래의 천만 감독님을 놓쳐서가 아니다. 그분은 날아갔지만 그때의 부끄러움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괴로운 기억은 날려 보내자. 훠이훠이 학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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