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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부기 Aug 21. 2024

웰컴 투 시랜드

시대륙에 착륙하다

'시월드'는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겨 입에 잘 안 붙는다. 대신 결혼과 동시에 발을 디딘 후 아직까지도 발 붙이고 굳건히 버티며 살아가는 힘을 받는 새로운 나의 대륙, '시랜드'로 칭하고 싶은 우리 시댁을 소개해보려 한다.



시부모님을 처음 뵌 건, 남편과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마 우리가 너무 뜨거운 연애를 하니, 결혼을 하려나보다 생각하시곤 나를 만나보고자 하셨던 것 같다.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의 부모님을 처음 뵌다는 설렘과 긴장감으로, 약속 전날 불의의 사고가 있었지만(길에서 넘어져 아스팔트에 무릎을 갈아버렸다..) 부상투혼으로 무릎에 드레싱을 한 채 상견례 장소같은 엄숙한 분위기의 식당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정말 화사하게 웃으시는 어머님과 다소 딱딱해 보이시는 아버님을 마주하며.


어머님은 나를 보자마자 며느리처럼 대하시며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고자 노력하셨지만, 아버님은 어떤 상태이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맘에 드시는지 아닌지 궁금했지만, 아버님께서는 말씀은 아끼시며 콜키지로 가져오신 로얄살루트만 열심히 드셨고, 넙죽넙죽 술을 받는 나의 잔도 계속 채워주셨다. 위스키가 동이 나자 소맥파티가 시작되었고, 아픈 무릎도 잊은 채 초긴장 상태로 자리에 임했던 나는 봉인 해제가 되어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드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나의 토를 받아주고, 우리 집 내 방까지 들어와 나를 침대에 눕힌 후 옆에 앉아있던 남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거실에서 티비를 보시던 엄마는 남편과 함께 들어온 나를 보시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우리의 상황을 외면하셨다. 어리석은 딸은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엄마 미안해요......'




첫 만남의 아픈 추억은 있었지만, 이후에도 나는 여자친구의 자격으로 시댁에 종종 드나들었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웃긴 일이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맛난 음식들에 아버님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보시는 부모님의 말씀에 이렇다 할 대답을 드리지 못하면서도 계속 시댁에서 가족같은 시간을 보낸 우리도 참 철부지 자식들이었다.


언니(남편의 여동생이지만, '아가씨' 호칭이 어려워, 내 맘대로 부른다..)도 나를 점점 편하게 대해주었고, 외출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 시댁에서 자연스레 밥을 먹고 있는 나를 불편하게 보지 않는 듯 했다. 한 번은 남편과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시댁 식구들이 군산에 놀러가신 걸 알게 되었는데, 냉큼 달려가 함께 여행을 하고 오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시댁이 편하고 좋았다. 그 때는 사실상 '시댁'이 아니었으므로...



결혼을 하고 시댁이 안 좋아진 것은 아니다. 분명 더 끈끈한 가족애가 생겼다. 하지만 남친이 남편으로 바뀌며 생기는 미묘한 변화가 있듯, 남친집이 아닌 시집을 가게 되며 느끼는 현실적인 고충이 나라고 없을 수가 없었다.


우선 가장 긴 연휴인 명절에는 나의 몸이 계속 시댁에 있어야 했다. 어머님은 제사가 많은 아버님 집안에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셔서 고생을 꽤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명절이나 제사 때 어머님만의 음식 레퍼토리가 있고, 현란한 솜씨가 그 내공을 반증한다. 허나 나는 경험도 없고 재주도 없어서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하곤 하는데, 그 민망함과 죄송함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특히나 경상도(부산 출신) 상여인 스타일의 어머님이 직설적으로 나에게 뭘 시키시거나, 맘에 안드는 걸 지적하시거나, 당신의 생각을 너무 세게 말씀하시면 반감이 들 때도 있다. 한 번은 어머님이 배려 없이 하시는 말씀에 상처를 받는다고 울면서 하소연을 해보기도 했지만, 어머님은 화법을 바꾸실 수 없으니 내가 그러려니 생각하고 이해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화끈하고 호탕한 어머님스타일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긴 명절 간 시댁에서 내리 지내는 동안 어머님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서운한게 생기다 보면, 상냥하고 다정한 친정엄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꼭 있었다.



남친일때와 달리 남편에게 내가 바라는 것이 생겼듯, 어머님도 아들의 여자친구로 나를 보실 때와 며느리로 보실 때의 시선이 다를 것이다. 어머님이 무심코 하신 '며느리가 어떻게 딸이 되느냐' 라는 말에 나 혼자 상처를 받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며느리는 딸이 아니니 시어머니께 더 이쁨을 받으려 노력해야 하고, 어머님도 딸이 아니니 더 신경써서 며느리를 챙겨줘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어머님은 모든 서운함을 일단락지어버리는 통큰 선물로 나를 감동시키하셨다. 결혼식에 다이아와 진주 목걸이를 선물로 들고 오셔서 신혼여행 가서 번갈아 하라며 건네셨고, 결혼 후 처음 맞는 내 생일에는 목걸이와 세트로 하라며 다이아 반지를 선물로 주시고 손수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이후 생일마다도 챙겨주셨던 건 물론이고, 이번 생일 때는 금팔찌를 들고 오셨다. 내가 좋은 시계, 반지, 목걸이는 있지만 팔찌가 없는 것을 보시매일 차고 다니라며 직접 골라 사오신 고가의 팔찌 선물은, 생색내기가 아니라 애정과 정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나는 어머님의 진심을 느끼며 마음 속 깊이 감사했다.


출산 직후 어머님께서 병원으로 갖다주신 음식들과 어머님께서 손수 차려주신 생일상♡
임신 중 시부모님과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 여행, 무려 시저샐러드와 파네파스타를 직접 만들어주신 스윗 아버님..!



한 번은 남편이 부부싸움을 크게 하고 집을 나가서, 억장이 무너져 어머님께 울면서 전화를 했더니 유전자에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신다. 그 유전자란 아버님을 지칭하는 것일텐데, 패닉 상태인 며느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남편과 아버지로서 완벽해 보이는 아버님의 유전자를 탓하시는 것도 당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나에게 참고 체념하라 하시는 것만 같은 어머님이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머님과 많이 닮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매사의 준비가 되어있는 남편과 살다 보니, 무엇이 현명한 사고이고 대처인지를 알게 되었다. 상대의 생각과 발언을 내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님의 불만, 어머님의 기대, 어머님의 애환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해석하고 왈가왈부할 것인가. 어머님의 생각과 말씀은 그대로 어머님의 생각이고, 말씀일 뿐이다. 남편을 대하는 태도도 역시 그러해야 결혼 생활을 슬기롭게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시댁과 우리집은 다른 환경이기에, 우리집 사람들과 시댁 사람들은 다른 사고방식, 다른 화법, 다른 태도를 지닌다. 이 당연한 사실을 처음 시댁 식구가 되었을 때는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 '우리집에서는 안 그러는데 시댁은 왜 이럴까?'라는 불만섞인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리고 시댁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고 문제가 없는 일들을 나 혼자 과대해석하고 문제삼아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시댁의 축소판인 남편을 대하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고민을 퇴치할 근본적인 해법이 같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시댁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떠한 기대나 주관적인 해석 없이.


남편은 어린 시절 창원에 잠깐 살았을 뿐인데 본가에 가면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나름 목동키즈인데 말이다.) 부모님의 친숙한 말투가 본인에게도 자연스럽게 녹아있으며, 그만큼 경상도 문화를 본인의 스타일로 받아들인다는 거다. '지금 이 상황에 왜 아무도 말을 안하지?' 생각이 드는 어색한 침묵의 시간에도, 시댁의 가족들은 누구도 불편한 기색이 없다. 우리가족 같으면 서로가 삐졌거나 서운함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뭉칠 때 뭉치고, 외에는 각자 흩어져 할 일 하는 분위기는 외려 적응을 하고 나니 편하고 좋아졌다. 중간중간 피드백이 없는 것도, 매사를 공유하고 대화 지향형인 우리 가족과는 많이 달랐지만, 쏘 쿨한 시댁의 문화가 '시월드' 또는 '시짜'로 속칭되는 시댁 프레임의 원천을 봉쇄해버렸다.



우리 시댁 가족들이 정이 많고 사랑이 깊으신 분들이라는 걸 항상 느낀다. 남편 때문에 생긴 화가 시댁을 생각하면 누그러질 때가 있고, 시댁에서 받은 상처가 남편에 의해 치유될 때가 있다. 그들은 그렇게 근본적으로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사랑은 요란스럽게 넘치지 않고, 은은하게 기저에 깔려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된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한 시댁의 삶과 분위기에 나는 점점 녹아들고, 매료되어 가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고성의 카페 도어스. 시댁에 가면 가족끼리, 혹은 남편과 자주 들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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