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과 습한 장마가 신체리듬을 느리게 또 완만하게 만드는지, 요새는 잠을 비교적 오래 자는 편인데도 아침에 눈 뜨기가 힘들고, 일어나서도 멍하거나 피곤한 느낌이 지속된다. 몸이 스스로의 시계를 off 하고, 환경에 맞춰 (또는 인지된 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느낌이다.
오늘의 출근을 준비할 마음으로, 조용히 일어나 안방 욕실로 향했다. 메이크업 중 아이가 잠에서 깨면 곤란하니 (깰 경우 바로 욕실로 달려와 울먹이며 "엄마 화장 안 해, 엄마 출근 안 해"를 반복한다.) 신속한 스킬로 양치-세안-메이크업을 진행한다. 아이가 예민한 시기에는 울면서 달려오는 아이의 헐떡이는 숨소리(환청)가 들려 심장이 쿵쿵 내려앉기도 한다. 엄마의 마음이란, 짜증이 나도 보채고 안기는 아이를 품어주고 싶은 본능이 깔려있는 법이다. 다행히 오늘은 옷만 갈아입으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최근 나의 직장인 학교가 방학을 하면서 출근 시간에 여유가 생겼지만, 나의 아침 루틴은 아이 어린이집 등원에 맞춰져 있다.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직후엔 아이가 바로 깨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해야 한다. 아이가 일찍 깨어나 아침도 먹고 활동도 해야, 어린이집에서 정해진 점심시간에 밥도 먹고, 낮잠시간에 잠도 잘 것이기 때문이다. 출근 준비를 마치면, 아이를 깨워 등원을 도와주실 친정 엄마가 오실 때까지 아이와 놀아준다. 원래는 내 아침식사를 간단히 챙기며 아이에게도 간식을 주었는데, 할머니 집에 가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 아이에게 간식을 주는 건 아니다 싶어 요새는 아침에 뭘 먹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 커피만큼은 아이에게 내려달라고 해(커피머신 누르는 걸 좋아한다^^) 우유를 섞어 플랫화이트로 마시면 그게 내 식사이자, 각성제이자, 자양강장제이다.
역시 이른 기상과 함께 분주함으로 손주의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신 엄마는, 딸의 집으로 손주를 데리러 오신다. (엄마 또한 식사는 못하시고, 피곤하시니 커피 한 잔만 드시고 오시는 것 같다ㅠㅠ) 평소 같으면 할머니와 상봉한 아들이 온갖 애교를 부리고 깨가 쏟아지지만, 오늘은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거실 바닥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최근 몇 번의 감기와 날씨로 인한 영향도 있을테지만, 두 돌 전 발생한다는 재접근기(: 아기 때 이후 돌아온 엄마 껌딱지 시기)가 27개월인 지금 뒤늦게 온 것 같다. 지난 달부터 전학 간 어린이집을 본격적으로 다니며, 잔병치레로 계속 소아과를 드나들었고 (병원에 극도로 겁을 내는 아들과 소아과 가는 일은, 당사자는 물론 부모와 조부모까지 멘탈이 털리는 일이다.) 나의 해외 출장을 이유로 일주일 간 아들과 떨어져 있기도 했다. 때로는 힘들고 무기력한 날씨에 엄마 팔을 만지며 편히 늦잠을 자고 집에서 뒹굴고 싶을텐데,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기를 깨우고, 할머니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어린이집을 가야한다 하니, 두 살 아이 입장에서 이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순탄할 리 없다. 떼를 쓰고 목 놓아 울지 않는 것만으로 너무나 고맙고, 다행이다.
오늘도 열심히 회유하여 할머니 집에 가게 된 아이 손에 붙들려, 나도 같은 아파트 옆 통로인 엄마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만난 동네 엄마를 보고도 평소 인사성 밝던 아이는 등을 돌린 채 모른척하고, 적극적으로 누르던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는다. 할머니 집이 있는 층에 도달했을 때, 아이는 내리지 않으려 한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아이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밀며 "너는 내리지 마, 엄마랑 할머니만 내릴 거야!" 하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이라고 하기엔 조금 더 어린, 그렇다고 애기도 아닌 아이는 속에 붇받치는 서운함, 미련, 내키지 않음을 그저 '와아앙'하는 울음으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울음이 터진 아이를 안고 친정엄마 집에 들어오니, 아이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돌아온다. 엄마를 보고 웃어달라 했지만, 웃음을 보고 나면 엄마가 갈 것 같은지 나를 절대 보지는 않는다. 그 사이 지원군이신 친정엄마가 아들이 좋아하는 꽃병과 TV 리모컨을 가지고 오셔서 유인을 시작하셨다. 아이는 더 저항해도 엄마가 출근할 걸 알아서였을까?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어떤 계산인지 모르겠으나, 이내 나를 보고 "엄마 출근하고 일찍 올거야!?"라고 확신인지 확인인지의 말을 뱉는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당연하지~엄마 회사 갔다가 일찍 올거야!"라며 아들에게 뽀뽀를 하니, 엄마 나가는 신발장 중문까지 본인이 열어주겠다 한다. 아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아들이 중문을 닫기 전 내가 먼저 현관문을 닫았다.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미안함과 짠함이 몰려왔다.
남은 준비를 하고 출근을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 문을 열며, 범퍼에 떡하니 생긴 스크래치를 보았다. 몇일 전 뺑소니를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편과 나는 범인을 잡겠다고 주말동안 빌트인캠 기록을 뒤지고 아파트 주차장 CCTV를 조회했지만 헛수고였다. 마지막 나의 사내 주차장 CCTV 기록을 조회하고자 절차를 알아보던 중에는, 이미 범인은 CCTV가 없다는 걸 (잡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뺑소니를 친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범인을 잡는다는 보장도 없고, 각종 기록 조회 과정에서 괴롭혀야 하는 보안 담당자들에게도 민폐일테니, 액뗌으로 생각하고 그냥 자비로 처리하자는 생각이 커졌다. 비용이 꽤나 들만한 피해지만, 우리 가족에게 만약 이보다 더 큰 액운이 닥쳐야 했을 거라면 이걸로 막아졌으면 좋겠다. 남들 눈엔 우리 가족이 별 걱정이나 문제 없이 비교적 편하게 잘 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내가 매사 가족의 무사안일을 위해 기도한다면 극도로 이기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사는 궁극적인 이유가 그것인데, 누가 뭐라 해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그를 위한 나의 노력을 멈출 이유는 없다. 또 보여지는 게 전부는 아니다.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사는 미혼의 친구들과 후배들이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할 때면, 나는 경험자로서 "결혼은 안해도 되는데 하면 좋긴 해.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치만 애를 갖는 건 선택이라고 생각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애가 있을 때 없을 때를 모두 경험해 보았기에, 둘 다 좋다는 건 내가 몸소 느낀 사실이다. 그래서 굳이 모순적으로 "그런데 애가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내 말을 듣는 상대는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얘는 남편이랑 사이도 그저 그렇고, 애 키우는 것도 많이 힘들구나..'
물론 우리 부부가 엄청나게 애틋한 사랑을 하는 것도, 육아와 가정생활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나를 안아주며 뽀뽀하는 남편의 눈에는 나를 향한 커다란 사랑과 신뢰가 담겨 있다. 그건 세상 어디에서도 천금을 주어도 얻을 수 없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하루하루 본인의 한계를 두드리며 세상을 알아가려 힘쓰는 아들이 엄마아빠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환희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내 곁의 천사가 나를 지켜주는구나' 라는 평안함이 들게 한다.
갓 태어난 아들과 초보아빠 남편과 함께 어쩔 줄 몰랐던 조리원 시절. 우린 불안과 고민과 노력의 시기를 지나, 지금의 안정과 평화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