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 2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같은 반 친구 집에서였다. 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 그 친구가, 여럿이서 함께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며 동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리였다. 그 시절 아이들은 무엇이든, 그것이 놀이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면,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고, 친구네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는 영화 속 노래들에 맞춰 온몸을 신나게 들썩였다.
어렸을 적부터 뮤지컬이나 오페라 장르보다는,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에만 집중하는 작품을 더 좋아했다. 대사로 이어지던 상황에 불현듯 노래가 끼어들면 어쩐지 산통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고, 극에 대한 몰입과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혹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새겨진 작품이 바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다. 잘츠부르크를 가면 미라벨 정원을 꼭 방문하리라 다짐하고 있었기에, 여행 가기 전 '사운드 오브 뮤직'을 다시 봤다. 미라벨 정원을 배경으로 하는 '도레미송' 파트를 집중적으로.
영화에 출연한 일곱 명의 아역 배우 중 두 명(첫째와 둘째 딸)과 폰 트랩 대령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 역의 줄리 앤드류스는 얼마 전 구순을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나온 지 벌써 60주년이라고 하니.. 그러나 탄생한 지 반 세기도 더 지난 작품은 (화면 색감을 제외하면) 촌스럽다는 느낌 전혀 없이, 초등학교 시절 느꼈던 그 '흥'을 되살려주었다.
'도레미송'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원어로 다 외운 곡이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외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소리 들리는 대로 공책에 한글로 적어 두고서는, 열심히 따라 불러 본 기억이.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전 나는 그렇게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 부르고 또 부르며 '계이름'에 친숙해졌고, 피아노를 더 열심히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키워갔다. 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가 동생을 더 낳아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작품 탄생 60년이 지난 겨울에 찾은 미라벨 정원은 영화 속 풍경과 사뭇 달라 보였다. 나지막이 꽃들이 자라나던 자리는 푸르름이 퇴색된 잔디만이 지키고 있었고, 마리아와 아이들이 떠난 공간으로 연신 스산한 겨울바람이 스쳤다. '도레미송'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후문 쪽 계단은 한시적으로 출입이 차단되어 있었다. 노래와 아이들로 떠들썩했던 이곳이, 사정없이 흘러간 세월, 세상을 떠난 주인공들과 함께 생의 활기를 잃어버린 듯했다. 그 삭막함은 겨울이라는 계절 탓일 텐데, 어쩐지 나는 그것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그 시절 친구들처럼 느껴져 맘 한편이 헛헛해졌다. 공허함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마음은 에너지 넘치던 '도레미송'을 더욱 간절하게 불러냈고, 나는 머릿속으로 도레미송의 장면들을 곱씹으며 눈앞의 쓸쓸한 미라벨 정원에 온기를 덧씌워보려 애썼다.
마리아와 아이들이 딛고 지나 간 분수대 위로 슬며시 발을 올려 보았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도레미송에 맞춰 씩씩하게 팔을 휘저으며 걸어가던 장면을 떠올리며, 마치 내가 폰 트랩 대령의 자녀라도 된 듯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보았다. 차마 팔을 신나게 흔들지는 못했으나.. 미라벨 정원 위로 회색 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저 멀리 언덕 위의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는 성에 시선을 내어주며 아이들은 도레미 송을 부르고, 분수대 위를 신나게 걷고, 초록빛 터널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통과해 후문 앞 계단에서 노래의 마지막을 소리 높여 불렀다.
그 순간 아이들은 분명 마리아와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고등학교 축제기간을 앞두고, 친구들과 중창 발표 준비를 하며 나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더랬다. 같은 목표를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가 되어갈 때의 그 짜릿했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다시 그런 순간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이 내게 늘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고양감'을 갈망하는 마음이, 미라벨 정원에서 솟구쳐 흐르는 것을 느꼈다. 미라벨 정원의 겨울과,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이 주는 쓸쓸함이 짙어질수록,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