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20여년 뒤 나는 형사합의부에서 배석판사로 일하고 있었다.
잠결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여기는 집이 아닌데..'
흐릿하게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 판사의 얼굴이 보였다. 참, 어제도 밤을 샜지.
"오판사님, 또 법복 덮고 사무실에서 잤구나."
나는 눈도 반 밖에 못 뜬 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시계를 보았다. 악! 벌써 8시 반이라니...
오늘 반드시 납품(부장판사에게 판결문을 올리고 검수받는 것을 뜻함)해야 하는데
부장님이 출근할 시간이다.
부랴부랴 쓰던 판결문을 마무리하고 오전 재판에 들어갔다. 연일 밤을 새다시피 했던 탓에 조용한 법정에 말도 없이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판사가 졸면 피고인들이 얼마나 법정을 우습게 보겠는가. 졸릴 때마다 법복 아래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잠을 깨우고 있었다.
"20**고합** 사건 피고인과 변호인 출석했나요?"
그 사건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이 사건은 대기업에 다니는 멀쩡하게 생긴 피고인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돌로 여중생의 머리를 쳐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된 건이다. 피고인은 극렬하게 부인하며 피해자가 밤이라서 다른 사람을 자신과 헷갈린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조서를 모두 부인했고 피해자의 법정 증언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어머니와 몇 번이나 통화했지만 그 어머니는 완강했다.
"절대 제 아이를 법정에 출석시킬 수 없어요. 제 아이가 받은 충격도 충격이고 여자애가 이런 일로 법정에 간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얼마나 나쁜 소문이 나겠어요"
"어머니, 성폭력 사건은 비공개 재판이 가능해서 소문날 일도 없을 거고요..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설득해도 어머니는 불안해 하며 출석시킬 수 없다고 했고 부장님은 그 어머니에게 아이가 편안해 하는 장소(예를 들면 그 아이의 집) 어디라도 가서 증언을 듣겠다고까지 말한 상태였다. 범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그 아이 밖에 없었고 씨씨티브이 등 어떤 자료도 없는 상황. 아이의 증언을 듣지 않으면 입증부족으로 무죄를 선고할 수 밖에 없다.
"이 사건 증인 000 출석했나요?"
법정엔 아무도 없다. 휴... 결국 나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와 아이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떠올리기도 싫은 치욕스런 경험을 이 온기 하나 없는 낯선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 법정 직원들(주로 남성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된 상태에서 말해야 한다. 게다가 법정은 피해자를 이해하기보다 의심하는 곳이다. 의심 가득한 질문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해되지 않게 내 말을 전달한다는 것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이미 아이는 돌로 맞아 상처까지 있을 텐데 그 충격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살아 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형사법은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범죄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게 원칙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애매하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근대에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절 국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특히 여성)을 증거도 없이 죽여 버릴 수 있었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형사처벌에는 엄격한 유죄의 증명을 요한다. 이런 원칙은 누구에게라도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은 너무나 특수하다. 성폭력 자체의 사회적 해악과 심각성, 피해자들의 충격, 진술의 어려움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피해자들의 진술이 왜곡되거나 오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는 있다. 그래야만 피해자들도 용기를 내서 고발이라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법정은 피고인의 입장(성폭력 사건에서는 결국 남성들의 입장이다)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질문을 허용하는 곳인데다(반대신문권의 보장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적지 않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여성들의 경험과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법정에서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데 심각한 충격을 받고 더 큰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일도 적지 않다. 물론 이 사건은 여중생이기 때문에 좀 나을 것이다. 정황상 피해자가 원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으므로.
순간 끼익 하고 법정의 일반인 출입문이 열렸다. 그 엄마다. 그리고 뒤에 한 소녀가 들어온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끼고 우리를 향해 목례를 한다. 교복을 입고 있다. 왔구나. 왠지 눈물이 나올 거 같다. 쉽지 않았을 텐데...
"000 맞습니까?" 아이는 법대 위 증언석에 앉았다.
"출석을 많이 꺼렸는데 지금은 괜찮습니까? 다친 데는 어때요?"
딸을 키우는 우리 부장님은 성인 여성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시선을 던지지만 학생들에게는 아빠 같은 표정으로 편안함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괜찮습니다. 사실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저는 이 자리에 나오고 싶었어요. 제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무엇보다 제가 말을 해서 꼭 그 사람이 처벌받고 다른 아이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는 다소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매우 침착하게 변호인의 모든 질문에 답했다. 다행히 변호인도 여중생임을 감안해서 통상 성폭력 사건에서 행해지는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 사람이 분명합니다. 저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저 분은 술에 취해 있었고 돌로 저를 내려 칠 때도 비틀거려서 제가 피하는 바람에 정면으로 맞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피는 났지만 정신을 잃지도 않았고 그 사람이 바지를 벗으려고 할 때 또렷이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그곳엔 가로등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도 않았어요"
"반드시 엄벌에 처해 주세요. 저 같은 아이들이 학원 다녀올 때마다 밤인데 저런 아저씨들 때문에 너무 무섭습니다.
며칠 뒤 나는 평소처럼 야근을 하며 선고를 앞둔 이 사건 기록을 보았다. 아이는 너무나 다행히 돌에 정면으로 맞지 않았다. 정면으로 맞았다면 얼굴이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술취한 아저씨의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혀 학교 교문으로 끌려 들어간 아이는 도망을 시도하다 돌에 맞는다.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아저씨와 어둠 속에 둘만 남겨진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무력감, 몇 분뒤면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공포...
머리에서 피는 흐르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저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는 아저씨가 바지를 벗느라 비틀거리는 틈을 타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아저씨가 따라와 아이는 피를 닦을 틈도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편의점 주인은 피가 범벅이 되어 이마며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 아이를 보고 아연실색이 되었다. 그나마 그 편의점이 문을 열어놓았길래 망정이지만 이 아이는 다시 그 길을 잘 다닐 수 있을까. 남자라는 존재를 신뢰할 수 있을까.
기록을 보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더니 통곡이 되고 오열이 되었다. 기록 위로 눈물이 우두두 떨어져 급히 휴지로 닦았다. 기록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이렇게 울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울었다.
20년간 잘 참았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20년이 지나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일을 겪은 아이는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국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히 함으로써 말하지 못한 억울함은 겪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 일로, 20년 전 말하지 못했던 열 두 살의 나,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기 위해 지하 300층쯤 되는 창고에 가둬놓은 어린 나는 문을 부수고 쿵쿵 뛰어나와 나를 째려보며 서 있었다. 오래 방치된 아이는 상처와 분노로 세포 하나하나가 벌떡거렸다. 그 엄청난 분노와 상처가 봇물 터지듯 내 목을 치고 올라왔다.
그 날 이후 나는 1988년 그 날에 대해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12살 때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아주 오랫동안 말을 못하고 살았네요"
머리를 통해 의식적으로 이 사람한테는 말해야겠다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서 말이 막바로 나갔다. 참 묘한 것은 그 때도 나는 친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말할 수 있거든"
근래 나의 최고의 치유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렇구나. 마음은 아는구나.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안전하고 안 하고의 문제와 다르구나. 직장사람들, 친구들도 분명 좋은 사람들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땐 안전한 곳이라고 여긴 것 같은데 판단을 업으로 하는 판사들, 또는 내가 나를 이해해줬으면 기대하는 친구들의 경우 혹여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 마음 속 깊이 있었었나 보다. 치유되지 못해 말하지 못한 시간들, 대상들, 모두 이유가 있었구나. 그랬구나.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내 의식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몸은 20년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지속적으로 비슷한 스트레스 상황을 회피하고 살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현재 남편인 당시 남자친구와 살인의 추억을 보러 갔을 때 말이다. 판사 때 저 일이 있기 7~8년 전, 사법연수생 때다.
나는 무서운 영화도 잘 보는 편이었고 더구나 살인의 추억은 익히 어릴 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영화를 선택했다. 형사들이 범인을 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실수하고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성들이 타겟이 되고 그들이 아무렇게나 난도질 당한 채 죽어 있는 모습이 비칠 때마다 왠지 익숙한 공포감 같은 것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며 몸이 바르르 떨렸다. 떨림이 영화를 보는 내내 멈추질 않았다.
마치 열두 살 그 때처럼 눈을 질끈 감고 소리만 들었다. 영화를 반의 반도 제대로 못봤다. 눈을 뜨면 끔찍한 일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일이 벌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는 영화대로 흐르고 나는 어느 새 내 기억 속 감정 속에서 그 날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여자들처럼 찬 바닥에 내동댕이쳐 질 수도 있었다는, 내가 실제 겪었던 그 가능성이 나를 다시 목조르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난뒤 거의 남자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갔다. 남들은 왠 오버냐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가 다 아는 스토리 아닌가.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것은 내 의식, 내 이성이 인식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영화 마지막에 아이가 했던 말처럼, 1988년의 그 놈도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 놈도 영화 속 범인처럼 잡히지 않았고 누군지도 모른다.
당시 국가는 열두살의 나만큼이나 무력했고, 그 여성들은 죽어서, 나는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 놈들은 잡히지 않았다 안도하며 아무일 없었던 듯 살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