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호사 J Oct 30. 2020

7. 딸들아 마음껏 분노하렴,  엄마들이 지켜줄께

 스쿨미투에 자책감을 느끼다

"이제 다 괜찮아요. 저는 오래 전부터 치유된 거 같아요..."


몇 달 전 시작한 치유상담 초기에만 해도 난 이런 얘길 자주 했다. 되돌아보면  치유선생님 입장에선 황당했을 거 같다. 여전히 열두살 때 얘기를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다음에 만나면 괜찮다, 치유됐다 그러니.


하지만 상담이 계속되면서 나는 괜찮다는 말을 적게 하고 대신 분노를 점차 드러내게 되었다.

공감 덕분이다. 치유선생님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줄 때, 그리고 내가 그 공감에 다시 공감하여 펑펑 울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 확실히 또 한번, 축축하고 습습했던 상처에 햇볕이 비쳐 산뜻하고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나는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만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의 반응을 보니 내가 얼마나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지. 괜찮지 않은 게 너무 당연한 거야. 죽이고 싶고 분노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마음껏 화내도 되, 자꾸 괜찮다고 애써 덮지 않아도 되"

 

이렇게 충분히 공감받고 인정받다 보니 나도 몰랐던 내 상처들이 "옆 동네 그 상처는 좀 나아졌대? 그럼 나도 좀..."하며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며칠 전 스쿨미투로 징계받은 교사들 상당수가 다시 담임으로 복귀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스쿨미투 사안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정치하는 엄마들 사이트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선생이라는 놈들이 아이들에게 했다는 말들을 보는 순간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니면 남자들은 성욕을 참을 수 없다'

'여자들은 허벅지가 튼실해야 한다'

'몸 굴리러 다녀서 치마를 그렇게 짧게 입었냐'

'너희가 할 줄 아는 게 다리 벌리는 것 밖에 없다'

'세월호 친구 곁으로 보내줘?'

'나는 정관수술을 했으니 너희와 성관계를 해도 임신하지 않아 괜찮다'


가슴에서 일어난 뜨거운 분노가 확 머리까지 번졌다. 한참 욕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마음이 마구 헤집히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까지 왈칵 나왔다. 동시에 내가 학교 다닐 때 겪었던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생 주임이란 인간이 운동장에서 내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혼나야 한다며 뒤에서 내 가슴을 주물렀던 것, 그 때 다른 선생님들도 다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것.

#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 수학여행 때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쭉 세워놓고 남자아이들은 고추를 만지고 여자아이들은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브래지어 착용 여부를 확인한 것.

# 중학교 2학년 때 초록색 쟈켓을 입고 육교를 올라가는데 50~6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술취한 척(?)하며 나를 껴안았던 것, 그 아저씨가 넘어질까봐 강하게 밀치지도 못했던 것.

# 중학교 때 수시로 학교 주변에서 바바리맨을 만나서 무서웠던 것

# 중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이상한 아저씨가 신문지를 둘둘 말아 친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참 귀엽네" 했던 것

# 고등학교 2~3학년 때 수학선생님이 자습 마치고 가는 나와 친구들에게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고 나를 마지막에 내려주겠다고 하더니 노래방에 가서 딱 한 곡만 부르고 가자고 했고 노래를 부르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키스를 하려고 해서 밀치고 도망쳤던 것

# 고등학교 때 입만 열면 술냄새, 담배냄새가 나는 나이든 남자 선생님이 "너희들은 어차피 공부해 봐야 소용 없다. 잠잘 때 남자들한테나 잘 해 줘라" 했던 것

# 고등학교 때  또다른 남자선생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니는 속살도 그리 뽀얗나" 했던 것.

# 대학교 때 친구와 지나가는데 할아버지가 반팔 밑의 내 팔뚝살을 갑자기 꼬집으며 "아이고 귀엽네" 했던 것.

# 대학교 때 교수님이 여학생들에게만 "거기 예쁜 여학생 발표해 보세요" 했던 것.


이 모든 장면들에서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하나 같이 그들이 실실 쪼개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너무 싫고 혐오스러우면서도 상대인 어른이 무안할까봐 또는 나를 혼낼까봐 주로 웃으면서 모르는 척 하거나 피하기만 한 점이다. 단 한 번도 제대로 화를 내 본 적이 없다. 겨우 마지막 # 에서 "이 미친.." 이라고 소리쳤을 뿐이다. 그 때도 나는 상대가 어른이랍시고 배려를 했던 것이고, 시간이 지나서도 '이 정도 일들은 다 겪지, 별 일도 아닌데 뭐', '이젠 괜찮아'란 마음으로 쉽게 덮었다.


쉽게 덮은 상처는 반드시 덧난다. 그래서일까. 마치 내가 잘못해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딸들이 저런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만 같은 자책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더 서럽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학창시절, 왜 그렇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정과 학교에서 받은 모든 교육이 나 자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하게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는데 교육이란 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여전히 어른들 말을 잘 듣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면서도 아이들 귀에 쓰레기를 퍼붓는 사람들. 저런 말을 같이 듣고, 저런 말을 해도 멀쩡한 선생님들을 본 남학생들은, 그리고 직접 당하지 않은 여학생들은 또 그래도 된다고 믿고 무감각해질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암묵적 허용을 무의식적으로 익히니 아무리 윤리교육을 하고 성교육을 해도 성희롱 가해자들은 법정에서도 "상대방도 웃었다, 항의하지 않았다", "농담이었다, 별 일 아니었다, 교육차원이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웃음은 약자들에게는 난처함과 고통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암묵적 허용에 길들여진 일부 판사들은 가해자들의 주장에 쉽게 수긍하고.  


우리 딸들을 더 이상 77년생 나처럼, 82년생 김지영처럼 살게 해선 안 된다. 내 머리속에 명확하게 저장되어 있는 선생님들과 어른들, 아이들이 스쿨미투를 하게 만든 선생님들 나라도 모두 끝까지 기억하고 지켜보겠다.

이전 06화 6. 성범죄자들을 찾아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