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호사 J Oct 30. 2020

8. 법정은 어떻게 여성을   억울하게 해 왔나(1)

 여성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가 문제다

나는 형사사건을 많이 하는, 법정에서 꽤 잘 싸우는 변호사다. 1심 유죄판결을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은 적도 여러번 있고 1심부터 대법원까지 무죄판결을 받아낸 적도 많다. 그렇기에 무죄 추정의 원칙은 내가 정말 자주 사용하는 논거다. 그런데 가끔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비춰 봐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도 있는데 주로 성폭력사건에서 무죄가 난 경우였다. 먼저 대표사례를 보자.

 



햇살이 나른한 오후였다. A는 늘 그렇듯 오후 3시까지 집안 청소를 마치고 빨래를 돌리고 장을 봐두었다. 집안이 어질러져 있는 걸 보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다. 방 한 칸에 거실, 화장실, 부엌이 딸려 있고 남들 발 언저리에 창문이 있는 반지하 집이라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쉽게 피었다.      


집의 거실 겸 부엌에는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A는 매일 청소를 마치면 그 테이블에 앉아 가계부도 쓰고 책도 읽고 저녁 요리를 뭐할까 고민도 했다. 그런데 그 날 A는, 평소와 달리 오늘 밤은 친구라도 부를까 고민했다. A의 남편 B가 지방에 일이 있어 저녁 때 없기 때문이다. 내일 점심 때나 온단다.


남편과는 결혼 10년차지만 이렇게 하루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아이가 아직 없어서일까. 남들은 남편이 어디 출장을 가든 주말부부를 하는게 소원이라는데.  남편과 A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 성격이 잘 맞는 사람끼리 만난 점에 감사하며 살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저 사람이 아니면 누구랑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 믿음 같은 게 서로에게 있었다.


그런 남편이 없는 저녁이니 A는 누군가 불러내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아까부터 고민 중이다.      

그 때 부부가 쉬는 날이면 늘 함께 술마시고 노는 사이인 친한 C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그 쪽에 갈일이 있는데 저녁 먹고 10시쯤 한잔 할 수 있어?”

 A는 내심 반가워하며 남편은 없지만 같이 마시자고 했고 집 근처에 있는 치킨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 10시, 치킨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C 혼자였다. 당연히 그의 부인 D와도 함께일 줄 알았는데 왜 혼자 왔냐는 말에 C는 “이 근처에는 일 때문에 온 거니까 나 혼자지”라고 무심하게 한 마디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옆 의자에 걸었다. A는 좀 의아했지만 C를 의심하는 듯한 티를 내는 것도 미안해서 그냥 있었다. 그렇게 A와 C는 마주앉아 치킨을 먹으며 맥주 2병에 소주 3병을 섞어 마셨고 중간에 B와 D의 전화를 받고 서로 바꿔주기도 했다.      


그러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C는 핸드폰으로 마지막 지하철 시간을 체크하더니 “아이쿠 차가 끊겼네, 오늘 남편도 없으니 나 너네 집에 재워줘라”라고 했고 A는 술에 취해 얼떨떨한 상황임에도 남자를 집에 들이는 게 탐탁치 않아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차편이 끊겼다는 사람에게 야박하게 할 수는 없어 “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나는 우리 앞집에 아는 언니 사는 데로 방이 하나 있으니 그리 가서 자지 뭐” 라고 말하고 함께 집으로 향했다.  

    

 A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장롱에서 C의 잠잘 자리를 준비해 주려고 이불을 꺼내는데 C는 냉장고를 열더니 또 판을 벌렸다.

 “어 여기 소주가 더 있네. 우리 딱 한 잔씩만 더 하자”

 A는 도저히 더 이상은 못먹는다고 잘라 말하며 나오려고 하는데 C가 A의 팔을 잡고 식탁 의자에 앉혔다.

 “아이고 남의 집에서 나 혼자 어떻게 마시냐. 딱 한잔만 더 하면 잠이 올 거 같으니 앉아있다 가라”고 굳이 A를 잡았다.


A는 잠깐 테이블에 앉아 있다 오바이트가 올라와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토를 하고 나오는데 C는 테이블에 앉아 있지 않았다. 벌개진 얼굴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화장실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던 C는 갑자기 A를 껴안으려고 했다.

 “나 사실 너를 좋아했다. 예전부터”


A는 너무 놀라서 C를 벗어나려고 C를 때리고 밀쳐 봤지만 C는 그럴수록 더 세게 A를 껴안고 침대로 데려가 눕히려고 했고 급기야 A의 뺨을 때렸다. 그렇게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C는 새벽 4~5시가 되어서야 주섬주섬 자신의 옷을 입고 A의 집에서 나갔고 A는 쓰러져 잠들었다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남편 B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남편 B는 엉망이 된 집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침대 위 이불은 어질러진채였고 물건들이 여기저기 마구 흩어진 상태였다.


바닥과 화장실 앞에 구토물도 흘러져 있었다. 남편 B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A는 C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말했다. B는 도통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머리까지 차오른 모습이 보였다. B는 C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는데 C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A는 다음날 바로 C를 형사고소했고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를 경찰에게 보여주었다. 경찰은 그 정도는 법적인 의미의 상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A는 사진을 찍어 제출했다. A와 B는 당연히 C를 처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수사 과정에서 상황이 급변했다. C는 최초 경찰 조사에서는 아무런 신체 접촉이 없었다고 하다가  변호사를 선임한 뒤 신체 접촉은 있었지만 A가 유혹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A는 몇 번이나 경찰, 검찰에서 부르는 것도 성실하게 응하고 C와 대질조사를 받다 호흡곤란으로 기절하기도 했다.      

 

A는 C의 주장에 너무 억울하다고 가슴을 쳤고 검찰은 A의 진술과 태도에 신뢰성이 있다고 보고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1심, 2심 모두 C의 손을 들어줬다.


헌법상 무죄 추정 원칙에 근거하여 검찰이 강간이라는 점을 엄격하게 증명해야 하는데 현저히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 협박이 있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고 정황상 A도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C를 집으로 데려온 것 같은 의심이 들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치우지도 않은 점 등이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취지였다.      

   

A는 판결문을 받아보고 읽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억울함이 밀려와 한 줄 한 줄 쉽게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억울함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남동생이 어지른 방에서 같이 놀았다고 엄마한테 A만 혼났을 때도, 학교에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 교탁 위에 쓰레기를 놔둔 사람으로 지목받아 선생님께 혼났을 때도 억울했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려면 쉽게 보내면 안 되겠지. 경찰과 검찰이 엄격 증명 원칙이나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범죄사실을 일일이 엄격하게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부족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A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다고 A가 판결문을 읽고 받은 충격이 덜어지진 않았다.

      

 ‘경험칙상’ A의 행동 하나하나가 “피해자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적혀 있는데 도저히 그 판단의 이유를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결론은 받아들인다 쳐도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험칙이라면 판사들이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실제 어떻게 행동하는지 반응하는지 모두 통계를 내어봤다는 뜻일까. 판사가 생각하는 경험칙과 내 경험이 다르다면 그건 내 잘못으로 돌려져야 하는 것인가. 판사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도 없이, A는 검찰과 법원에서 끊임없이 바람피운 여자로 의심되다가 그렇게 확정되어 버렸다. 두 사람이 그 사건 전후로 각자의 배우자를 배제하고 둘이서만 만남을 한 어떤 자료나 증거도 없었지만 A는 국가에 의해 난데없이 C가 좋아서 성관계까지 하고 남편을 배신한 몹쓸 년이 되어 버렸다.

     

 A는 그 날 이후 집에서도 밖에서도 등을 곧게 펴기가 어려웠다.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닌 것만 같았다. 늘 깨끗했던 집에는 곰팡이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끝도 없는 생각들이 돌고 돌면서 흐린 머리를 점령해 버렸다.


정말 좋아서 관계를 했다면 상처가 났겠는가? 정말 좋아서 했다면, A의 아무런 저항이 없었을 테고 그러면 방이 어질러질 이유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바람을 피웠다면 들키지 않기 위해서 A는 남편이 오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치웠을 것이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들이 억울한 마음과 쌍둥이처럼 붙어 낮에도 밤에도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었다.


A는 알몸이었다. 법정에서 자신의 말을 모두 거짓이라고 전제하며 질문을 퍼붓던 변호인 같기도 하고, 근엄하면서도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어떤 질문도 하지 않던 부장판사 같기도 하고, 비열한 눈매가 C 같기도 한 어떤 남자가 알몸의 A를 계속 쫓아왔다.


A는 손으로 몸 여기 저기를 가리며 남자를 피해 도망치기 바빴다. 그 남자는 옷을 손에 쥐고도 주지 않으면서 왜 옷을 입지 않냐고, 나를 유혹하는 거 아니냐고 소리쳤다. A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언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함에 더 크게 소리쳤지만 남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꿈에서 깬 A의 베게는 젖어 있었고 볼을 타고 눈물이 쪼르르 흘렀다. A는 판결 이후 몇 달째 등을 돌리고 자는 남편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전 07화 7. 딸들아 마음껏 분노하렴, 엄마들이 지켜줄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