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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Oct 31. 2020

10. 아이들과 함께 치유 중입니다

 자기공감, 가족공감, 사회공감

부부의 세계 지선우를 보면서 나는 결혼 초기의 나를 떠올렸다. 완벽하게 보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삶. 사실 지선우의 삶은 남편의 외도로 무너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안이 텅 비어 있는 보석처럼 그녀의 마음은 사회적 지위나 똑부러지는 업무처리와는 별개로 이미 공허하면서도 불안했을 것이다.


지선우가 아들에게 하는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가 얼마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공감'을 어려워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아이를 안아줘야 할 때 '숙제했니'를 묻고 부모의 관계로 인해 불안해 하는 아이에게 '학원 얘기'만 한다. 그렇게 마음을 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를 그녀의 트라우마에서 엿볼 수 있다.


지선우의 부모는 지선우가 학생 때 외도 문제로 크게 갈등이 있었고 어머니가 같이 차를 타고 가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둘 다 지선우 앞에서 피를 흘리며 사망했다. 지선우 입장에선 외도=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할 만했다. 지선우는 동정이 싫어 더 열심히 살았고 세상이 인정하는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성취를 위한 노력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돌볼 틈이 없다.


스스로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이 살았고,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도 없었던 지선우는 남편과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방법도 잘 모르고, 마음을 맞대는 일이 낯설고 어색했을 것이다. 필요성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의사일, 요리와 청소, 집안 가꾸기, 남편 챙기기 등을 더 완벽하게 더 잘 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지인들이나 이웃들한테 인정은 받았지만 정작 소중한 가족끼리 가장 중요하게 채워져야 부분이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 집이 반들반들해지고 내 모습이 화려해질수록 아이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안아주고 대화할 시간과 에너지는 줄어든다. 성취에 몰두할수록, 결과물에 집착할수록, 나만큼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아이에게 화가 나고, 나만큼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게 되고, 결과물만 신경쓰고 과정에 들인 노력과 마음을 인정하긴 힘들어진다.



나는 한참 아이들이 클 때, 판사이고 경제적으로 큰 걱정도 없었다. 남편도 착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고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자주 공허하고 불안했다. 그 땐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4화에서 기록한 성폭력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인지도 못하고 치유하지도 못한 채 아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내 무의식이 꾸욱꾸욱 누르고 있었으니 마음이 행복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억압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지"

치유선생님이 며칠 전 이렇게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게 한꺼번에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내 옆에는 늘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남편과 부모님, 시부모님까지 계셨는데도 나는 마치 열두살 그 아이처럼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할 거란 느낌, 내가 힘들어도 아무도 관심이 없을 거라는 느낌, 그러니 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실제 늦은 밤에 혼자 갈 때면 누군가 자꾸 쫓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언제 어디서라도 갑자기 불행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도 자주 올라왔다.


경상도 사람들로 애정표현을 극도로 터부시(?)하고 대신 불안과 걱정을 모두 잔소리로 표현하셨던 부모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이쁘다가도 버겁게 느껴지고, 아이들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갑자기 불안에 휩싸이고 그 불안을 나 역시도 공격적인 언행과 잔소리로 해결하고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결혼 이후 몇년은 직장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일할 때라 매일 야근하며 거의 번아웃이 올 만한 상황이었는데 쫓기듯 '더, 더, 뭔가 더 열심히'를 주문처럼 여기고 있던 나는 쉬어야 된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까지 스스로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고 있었으니 사회적, 의례적인 말은 많아도 집에 가서 하는 마음의 표현은 줄어들고 그러니 마음을 표현하는 게 점점 더 어렵게 되고, 대화가 없어지고, 그럴수록 고립감은 심해지고 괜히 억울하고 미운 마음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제는 내가 내 마음을 많이 안아준 후라서 가능한 것이지 그 당시엔 도대체 내가 왜 그런지 마음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불행감, 불안감, 공허감만 둥둥 떠다니다 훅 다가오고, 그러니 눈물이 어떤 맥락도 없이 나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다. 이 무렵 안 그래도 예민한 우리 아이들은 내 눈치를 많이 보고 말도 잘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내가 딱 한 가지 잘했던 게 있다면,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외면하지 않고 늘 이렇게 마음 속으로 외쳤던 것이다.

"꼭 행복하게 살 거야. 내가 생각하는 행복을 만들고 말거야"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1순위는 가족들과 행복해지고, 마음 속에 불안과 공허감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근데 과연 그게 될까? 원래 삶이며 결혼이라는 게 울면서 사는 건데 나만 행복을 너무 이상적으로 정의하고 발버둥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유가족들과 함께 하게 되면서 나는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참사 직후 안산에서 유가족 지원을 하면서 배 안에서 수거된 핸드폰을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일과 법률상담, 재판지원 등의 일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핸드폰을 포렌식한 자료를 보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이라 다 공부에만 찌들어 있었을 거 같아 더 마음이 아팠는데 엄마 아빠와 단톡방이나 문자로 대화를 매일 나누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사랑해란 말이 얼마나 귀하고도 슬프게 다가오던지... 유가족 텐트에서 엄마들은 나를 붙들고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아이한테 잘 해 줘.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시간에 꼭꼭 안아줘. 그냥 무조건 안아줘, 그리고 꼭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해줘. 그게 전부야."

나는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너무 큰 희생을 통해 알게 된 진짜 교훈이었기에 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아이들에게 거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한 번에 그렇게 되진 않았고 되다가도 다시 잔소리 대마왕처럼 행동하고 그랬지만 서서히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잠깐 회귀하더라도 나 자신을 예전처럼 몰아세우거나 책망하지 않고 먼저 내 불안을 인정하고 안아주고자 노력했다.


내가 왜 그 순간 잔소리를 하게 되는지 마음 깊이 들여다보고 어릴 때 있었던 일을 속속들이 기억해 내려고 했고 그 때 받은 상처들도 최대한 떠올려 안아주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아이들에 대한 내 불안은 엄마아빠의 불안이 전가된 것이었고 순수한 내 것이 아니었다.

아, 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엄마에게 감사하고 엄마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으니 엄마와 똑같은 엄마일 필요는 없지. 엄마는 엄마대로 그 때 최선을 다한 거야. 난 우리 엄마의 장점에 아이들의 마음부터 챙기는 그런 엄마가 되어야지.


나는 아주 천천히 변했고 아이들에 대해선 많이 편안해졌음을 스스로도 느꼈다. 그러나 그 사이 남편의 직장일로 큰 위기가 있었고 내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마다 난 남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부부싸움도 했다.


하지만 또 다시 그 위기를 잘 넘어 왔다. 요즘은 공허, 불안과 거의 빠이빠이한 상태다. 그 힘은 오직 치유선생님과 남편의 도움으로 '마음'을 챙긴 덕분이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에게 '선생님 말 잘 들었어?' '숙제는 뭐야?' 이런 얘기는 안 하려고 노력한다.


'오늘 즐거웠어?' '기분은 어때?' '너랑 얘기하니까 넘 재밌다' 라고 말하고, 부를 때도 '귀여운 우리 00' '이쁜 딸' '사랑스런 아들'이라고 부른다. 틈만 나면 '너는 정말 너무 이뻐' 라고 말한다(외모에 불만이 많은 시기이므로 일부러 자꾸 얘기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하루에 몇 번씩 안아준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을 땐 꼭 사과한다. 마음이 퍽퍽할 땐 사과가 죽어도 안 나오고 화만 나더니 홀가분해 진 이후로는 표현이 쉽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부제 :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지은이 : 네이딘 버크 해리스)라는 책에 따르면, 어미쥐가 사람의 따뜻한 포옹처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줄수록 새끼 쥐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는 낮아졌고, 게다가 스트레스 온도조절장치(스트레스를 받고 해소할 수 있는 힘)가 더 민감하고 효과적이었다.


세월호 엄마들이 나에게 한 얘기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이었던 거다. 이런 과정에서 서서히 내가 치유되고 있고 행복해짐을 느낀다. 처음엔 마음을 알아주는 말과 행동이 느끼하게 느껴지고 어색하기만 하더니 습관처럼 하다 보니 이젠 화낼 일이 거의 없다. 사춘기 딸이 엄청 예민한데도 싸울 일도 없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잔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더 공부를 안 한다. 하는 척만 할 뿐. 대신 사랑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알아서 챙긴다.


아이들은 어릴 때보다 더 자주 내 옆에 오고 말을 걸고 많이 웃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평생 처음으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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