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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Oct 31. 2020

9. 법정은 어떻게  여성을 억울하게 해 왔나(2)

 원래 분위기로 하는 거지 쑥스럽게 동의를 구하라고?

글을 쓰기 전에 떠오르는 성폭력 관련한 인식의 차이 장면 3개


(1) 사법연수원 시절, 판사였던 교수님이 형사실무 수업시간에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는 사람이랑 했으면 좀 양형을 줄여야겠죠. 똑같이 처벌하긴 그렇겠죠"

너무 놀라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왜 그렇게 판단하시는지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모르는 사람이랑 하는 것보다는 한 번 해 봤던 사람이면 덜 충격일 거 아니에요"  

참 인성 좋은 교수님이었는데 느낌의 간극이 컸다.


(2) "근데 여자들 가슴을 옷 위로 만지는 건 추행으로 처벌하긴 그렇지 않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옷 위와 살은 다르잖아"

"음 그럼 니 중요 부분을 옷 위로 만지면 처벌 안 해도 되?"

"..(얼굴이 붉어지며) 그건 아니지"

연수생 때 참 순진하고 핸섬한 짝꿍과의 대화다. 이런 대화로 남녀의 느낌과 생각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었다. 법조인 양성 과정에서 근엄한 수업보다 이런 솔직한 토론 과정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성폭력 사건의 처벌과 양형이 훨씬 여성들의 관점에서 이뤄지지 않을까 아쉬울 따름이다.

 

(3) "근데 우리가 분위기로 판단하고 그런 걸 하지, 묻고 답하고 합의하라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분위기로 하면 원하지 않는데 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위험하니까 법은 적어도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명확히 동의를 구하지 않고 몸으로 밀어붙였으면 강간이다 이렇게요"

"눈빛만 보고 아는 거지 동의하냐 안 하냐 이런 걸 어떻게 그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냐고.."

"강간 안 되려면 하는 분위기가 생기겠죠. 하하"

어떤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님과 나눈 대화다. 이렇게라도 얘기를 하는 게 반갑고 고맙다. 보통은 대화 자체를 꺼리게 되니까 더 변화가 없다.



형사재판을 다양하게 하다보면 성폭력사건 재판의 포인트와 내용이 다른 재판과 매우 다르고, 남성과 여성들의 상황판단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죄의 보호법익이나 구성요건과 관계 없는 질문이나 피해자 자체를 공격하는 질문들이 '반대신문권의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횡행하는 게 성폭력 사건의 재판이다. 듣다 보면 이게 피해자를 재판하자는 것인지 가해자를 재판하는 자리인지 헷갈릴 때가 적지 않다.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배석판사인 나라도 이런 질문을 하려고 했다.

"피고인, 피해자가 성관계를 원하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확인한 적 있어요?"

"무슨 근거로 그 시점에 피해자가 원한다고 판단했죠?"


이런 질문은 기소한 검사 측에서 해야 하는 질문인데 적어도 내 경험상 수년간의 재판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검사를 본 적이 없다.


검사들 개개인의 탓은 아니고 강간죄의 폭행협박을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이라고 해석하는 우리 판례가 첫번째 책임이요,


수사에 지나치게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공판을 치열하게 준비하지 못하도록 방치하는 검찰 조직구조에 두 번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법이라는 기준을 만들어 분쟁을 예방하고 분쟁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해결한다. 그런 기준인 법을 위반한 행위를 위법행위라고 하고 그것이 고의 과실로 행해져 손해까지 야기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 또한 그 불법행위들 중에서 불법성의 정도가 심한 것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국가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등은 따로 범죄로 구성해 국가가 형사처벌도 한다. 형사처벌은 결국 개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 법익을 보호하는 범죄에는 구체적인 보호법익이 있다. 절도, 강도죄는 재산이 보호법익이고 강간죄는 1990년대 이전엔 순결, 정조였다가(그 때까지도 여성을 남편을 위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후엔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뀌었다.


법정은 여성들을 잘 모른다. 법 자체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반영하는 데다, 판단권한을 가진 판사, 검사 대부분이 남성들이었고 그들의 관점이 다시 판례를 통해 세상의 관점, 기준이 되었다. 아주 오랫 동안.

비단 법정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건 남성이었고 남성들은 스스로를 모든 기준의 표준으로 삼았으며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 생계까지 이중삼중고를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세상의 표준이 되진 못했다.


"보이지 않는 여성들"(지은이 : 캐럴라인 크리아도 패레스)이라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무실 온도도 40대, 170센티미터의 표준 체격의 남성에 맞추어 표준이 정해지고 권장되어 여자들 기준에서는 5도가 낮다..... 피아노 표준 건반의 한 옥타브 간격, 휴대폰 사이즈, 자동차 설계, 의료, 일자리 등 모든 영역에서 여자의 데이터는 수집되지 않았다.....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런 현상이 법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성폭력 피해자의 대다수이자 사실상 보호법익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관점이 강간죄 판결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약간 다른 얘기지만 여성 참정권의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우리 여성들은 지금 당연한 듯 선거를 앞두고 후보를 고민하고 투표를 하고 있지만 불과 100여년전 여성들은 '남성보다 정신적, 육체적, 윤리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이유로 참정권 역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몰이해'와 '무시'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수십년 동안 목숨과 자유를 바쳐(참정권 운동 과정에서 수시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는 참정권이 없는 여성이 집회에서 발언만 해도 처벌이 가능했다) 요구와 주장을 멈추지 않았던 덕분에 지금 우리 여성들도 참정권을 누리고 있다(영화 '서프러제트'나 에밀리 팽크허스트의 연설문을 꼭 찾아보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몫을 다해야 한다. 고통을 직접 당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와 같은 경험을 다른 여성들이, 우리의 딸들이 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돌아와서, 강간죄의 폭행협박을 "피해자의 저항을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으로 과소해석하는 것(최협의설이라고 한다)은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책임을 묻는 기이한 현상을 만든다.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이고 피해자가 그걸 침해받았다고 하면 피고인, 피의자에게 "정말 피해여성의 동의를 받았는지, 명시적 동의가 있었는지, 무엇을 근거로 동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등등을 따져 물어야 하는데 반대로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어? 상처가 나도록 저항할 수도 있는데 안 한 건 너도 원해서지?" 이렇게 캐묻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나이가 많을수록,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여성과 남성이 기존에 알던 사이거나 함께 술을 마시거나 밤늦은 시각까지 같이 있었던 경우 "여자도 원했네 뭐" 라고 쉽게 의심한다.


이런 기준으로 강간죄를 판단하다 보니 폭행, 협박이 문제되지 않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대표적으로 안희정 1심 판결), 아동성범죄 등의 사건에서도 쉽게 피해자의 '합의', '동의'가 의심, 추정되기도 했다. 여성들의 두려움과 그에 따른 체념, 저항 포기 등의 반응은 받아들여지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반면, 남성들의 성욕과 동의 구하지 않음, 무작정 들이댐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 결과 성관계를 하면서도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밀어붙인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고, 저항했지만 상처가 날 만큼 저항하지 않거나 무서워서 저항조차 제대로 못한 피해자는 '넌 피해자답지 못하다' 는 낙인이 찍힌다.  


정말 문제는 법과 판례가 사람들의 행동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이 쌓일수록, 남성들은 여성들이 다칠 만큼 저항을 하지 않으면 강간이 아니니까, 명시적으로 동의를 묻지도 얻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면 지도 좋아하는 거지 뭐' 라고 임의로 판단하고 밀어 붙여도 된다는 허용기준을 공식적으로 습득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보호법익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된다. 더 높은 자리의 판사들이 남성의 관점으로 강간죄를 해석하고, 더 많은 판사들은 야근하느라, 다른 고민을 해 볼 여유도 없어서 과거 선례를 무작정 답습하다 보니 결국 보호법익과 괴리되는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 법원은 적극적 합의가 없는 성관계를 성폭력이라고 보고 있다. 즉 성행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이며, 의식적이며 자발적 동의가 있어야 하며, 침묵이나 저항 없음을 동의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5115.html).   


최근 우리 대법원과 고등법원도 성폭력, 성희롱 사건에 있어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한 해석을 해야 함을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폭행, 협박 자체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보는 최협의설은 그 판시보다 훨씬 오랫동안 견고하게 자리잡은 것이라 많은 법조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논리다. 비동의간음죄의 신설로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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