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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Oct 30. 2020

6. 성범죄자들을  찾아가다

두려움과 희망 중 희망에 무게를 두고 싶었다

법정에서 그 여중생을 본 이후 내 마음속에서는 자꾸 이런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울렸다.

'판단하고 평가하기보다 여전히 말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고 싶다'


결국 그 해를 마지막으로 판사를 그만두었다. 그다음해면 판사들이 선호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갈 수 있는 타이밍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했다.

"무슨 신상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다들 서울 법원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데 하필 이때 그만둬?"


이때 알았다. 사람들은 다 자기 얘기를 한다는 것을. 내가 타인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잘 관찰하면 내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예전의 나였다면 법원에 남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라는 글자를 명함에 넣는 게 남들 보기에 멋져 보이니까?


하지만 난 이미 열두 살의 나를 만난 이후 지반이 서서히 움직이듯 마음의 큰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곳이 아닌 내 마음이 가라는 데로 가자. 그게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그래서 로펌도 안 가고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고 일반적인 사건을 하면서 여가부의 성폭력 피해자 무료법률지원활동에 참여해서 피해자들도 대리했다.


역시 예전의 나처럼 고소는 생각도 못하거나 계속 망설이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면서 이런 얘기들을 자주 했다. "외면하면 상처가 더 오래갈 수도 있다, 함께 할 테니 용기를 내자, 피해를 당하고도 내가 참으면 시간이 갈수록 무기력함과 자괴감이 들고 분노가 쌓인다, 그게 몇십 년 뒤에 엉뚱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혼자가 아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에 하나 입증이 부족해서 또는 법리가 엄격해서 무죄가 나더라도 아예 얘기를 안 하는 것보다는 가해자에게 형사절차를 경험하게 하는 게 경각심을 주거나 내 입장을 알려 그나마 반성의 기회를 주는 길이다 등등"


열두 살의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어른이 된 내가 누군가에게라도 해줄 수 있어 감사했다.


그러다 여성단체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변호사님 교도소에서 성폭력 재범방지 교육 안 해 보실래요?"

"교도소라면... 성폭력 사건으로 유죄로 확정된 재소자들이요?"

"네, 강간 이상의 중범죄자들이죠"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재범방지"라는 말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논문에서 미국의 성폭력 재범방지 프로그램 내용 중에는 치유된 성폭력 피해자들이 재범방지 교육에 참여해서 경험을 나누고 진정한 반성을 유도한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어서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다른 매뉴얼이나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재범방지 교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인데, 당시만 해도 난 20년간 말하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그 내용의 구체성과 무관하게) 내가 다 치유되었고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 내가 평소 존경했던 그 여성단체 분의 말씀이 와 닿았다.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면 변합니다"


성범죄자들을 보는 것도 크게 두렵진 않았다. 나는 법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형사부에 2년 근무했다. 그동안 가벼운 사건부터 강간살인 사건까지 다양한 사건의 피고인들을 많이 보았고 나는 그들에 대한 처벌 여부와 정도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적어도 그들을 괴물처럼 여기고 있진 않았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무의식 중에 나는 여전히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열두 살에 머물러, 그 범죄자들을 마치 열두 살의 내가 맞닦드렸던 어른인 그놈처럼,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 나를 언제든지 압도하는 존재,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정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가족이 있고 학교를 졸업해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우리 사회처럼 직업군으로 봐도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전혀 못 받은 채 자라거나 극심한 학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 자신을 과도하게 억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을 뿐 그들도 악마나 괴물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재범방지 교육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강의 전날 밤 12시,

나는 사무실에서 피피티를 만들며 어휴, 미쳤지 미쳤어 등등 다양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미쳤었나 보다.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문자 남기고 내일 사라져 버릴까.'


바보 같이 피피티를 만들면서야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진 것이다. 법정에서는 법대로 그들과 내가 구분되고 나는 법복을 입고 권위를 가진 존재고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관계이니 내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도소의 강의실은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소규모 강의실이라 그들과 나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내가 침을 튀기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그들이 있다.


그들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이 과연 내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것인가, 조금이라도 설득될 것인가, 그러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만에 하나라도 내 말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내 말이 다 틀렸다고 항의하고 난리치면 어쩌지 별의 별 고민이 다 되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겠다고 한 내 자신을 원망하며, 피피티를 만드느라 거의 밤을 꼴딱 샌 뒤, 나는 목까지 올라오는 폴라티에 평소보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교도소로 향했다.


벌써 10년 정도 지난 일임에도 아직도 기억난다. 그 교도소의 풍경과 냄새, 복도, 긴장되던 내 마음이. 교도관이 안내해 준 강의실의 문을 열자 일제히 나에게 쏟아지는 눈빛.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도록 배치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내가 설 교탁이 있었다.


막상 그들의 악의 없는 눈빛을 보니 긴장이 풀렸다. 나는 자신있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판사로 일하다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 얘기도 듣고 제 얘기도 하고 싶어서 왔어요."


어떤 교육이든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내 말을 듣는 척 하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또는 자신의 얘기를 끝끝내 하지 않는다면 실패다.


나는 그들이 그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사건를 다시 떠올리고 그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언어화 할 수 있기를 그래서 자신과 사건을 직면할 수 있기를 바랬다.


강의 절반까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사건으로 처벌받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어, 주로 법정에서 피고인들과 피해자들 사이에서 다퉈지는 내용인 "동의, 합의"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남성들과 여성들이 몸에 대해 생각하는 것부터 다른 것 같다, 여성들은 신체의 중요 부분을 노출하는 게 화장실 갈 때나 있는 일이지 부모에게도 노출하지 않는다, 웃통도 안 벗고 다닌다, 그런데 성적 접촉은 내 맨살을 드러내는 일이고 아주 명확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수치감을 바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급하게 시도되어선 안된다.


그래서 아직 낯선 문화일 수는 있지만 명시적으로 구체적으로 묻고 답해서 합의되어야만 하지 아무리 여자친구나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분위기로, 눈치로 시도해선 안 된다, 여성들은 그 시도 자체에 압도되고 두려워서 싫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당신들이 당신들보다 힘쎈 판사나 검사 앞에서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성들은 당신들의 힘에 두려움을 느껴 거절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쑥스러워도 우리는 천천히 기다리며 물어봐야 한다"


예상보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들었고 나는 진지한 분위기에 힘입어 조심스럽게 내 얘기를 꺼냈다.


내가 열 두 살 때 겪은 일, 그 때의 공포, 이후 내가 겪었고 겪고 있는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당신들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나는 운좋게 이 정도였지만 그때 상처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여성들도 있다고.


성폭력에 대해 매우 가볍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지만(예를 들어 여자에게 술을 먹여 하는 건 학창시절 추억 같은 것으로 여긴다든지) 여성들 각자가 어떤 상처를 어느 정도로 받을지 모르기에 그렇게 쉽게 접근해선 안 되는 문제라고.


막상 그들에게 내 얘기를 하려니 너무 떨려서 상세한 얘기는 하지도 못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몇몇은 눈을 떨구고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고(알고 보니 아동성폭력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미안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그 사람들 중 리더로 보이는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말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제가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자, 우리 여기 모이는 일이 많지는 않지요. 변호사님도 자기 얘기를 하는 게 힘들 텐데 용기를 얼마나 냈겠습니까. 우리도 각자 얘기를 해 봅시다. 사실 우리끼리도 사건 얘기는 안 하잖아요. 그래도 여기서 다 털고 가는 게 나가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하며 그는 자신부터 사건 얘기를 했다. 그리고 돌아가며 각자 자신이 저지른 사건을 얘기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잘못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했지만 모두 처음으로 자신의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정에서는 형량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었는데 억울하다고 하면 형량이 높아지니 일단 자백부터 했지만 사건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형적인 외면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직면하고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야 최소한의 변화가 있을 터인데 자백을 하고 나면 오히려 피해자 얘기를 들을 기회는 전혀 없으니... 게다가 사건에 대해 생각조차 않고 스스로 차단해 버리면 어떻게 반성을 하지. 법원은 자백을 하면 진지한 반성이 있다고 양형을 감경해 주는데 그게 맞는 걸까. 안타까웠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 그들은 다시 각자의 수감실로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들 중 몇몇은 피해자한테 직접 얘기를 들어본 게 처음이라며 고마웠다며 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교도소로 오는 길은 매우 멀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가깝게 느껴졌다. 사람의 변화에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가. 하지만 가볍게 시작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 교육은 대단한 내용이 아니었고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그 시간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꾹 닫힌 상자를 열었서 들여다 본 거 같아 조금은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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