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88년 그 날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 생명과 안전의 문제다

by 변호사 J


1988년 가을이었다. 적당히 흐리고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조용한 일요일이었다. 당시 초등학생 5학년이었던 나는 웃옷은 하얀색, 아래는 남색인 체육복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 운동회 때 응원단장 역할을 해야 해서 일요일이지만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 연습하기로 했다. 응원연습은 언제나 신나고 재밌는 일이라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낼름 집에서 나와 학교로 향했다.


내가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이미 와 있었고 우리는 어디서 연습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학교에 아무도 없는 일요일이었지만 그땐 학교 정문이 휴일에도 열려있어서 운동장에서 안무연습을 하면 오가는 사람들이 볼까봐 좀 민망할 거 같았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학교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의 사이에 있는 좀 외진 곳, 실외 화장실 근처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핸드폰은 커녕 mp3 도 없던 시절 우리는 생목으로 노래를 불러가며 응원안무를 맞춰 보았고 깔깔 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한참 안무를 짜고 있는데 2~30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다소 큰 아저씨가 코트를 걸치고 성경책을 한 손에 든 채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착한 어린이는 친절해야 하므로 나는 저기 있다고 손가락으로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 쭉 가면 있어요"

그러자 아저씨는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같이 가줄래?"라고 했다. 그냥 가보면 알 텐데 싶었지만 착한 어린이는 친절해야 하므로 나는 아저씨 앞에서 걸으며 친구가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졌다. 평소 그 화장실은 푸세식 화장실이라 나는 그 곳에 가는 것을 끔찍히 싫어했지만 내가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하며 나는 ㄱ자로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 방향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화장실 앞에서였다. 그 놈이 갑자기 나를 학교 건물 벽쪽으로 밀어 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 참 예쁘게 생겼다. 공부도 잘하지?"

뜨겁고 불쾌한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내 얼굴 가까이까지 얼굴을 들이댄 그 놈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 나는 오늘 이 놈한테 이렇게 죽는 거구나'

나는 12살 평생 처음으로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쓰러질 거 같았지만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겠다 싶었다.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용기가 도저히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뜨지 못했다.


단 10분만에, 그것도 이 평온한 일요일에 화장실 알려주는 친절 한 번 베풀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저 내 목을 누르는 그 놈의 손이 끝내 내 목을 조르지 않을까 싶어 그 놈의 손가락을 소심하게 붙잡고 있었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놈이 바지 허리띠의 버클을 푸는지 소리가 찰칵 들렸다.


'아 이거구나'

제대로 된 성교육도 받지 못했던 때라 나는 그 놈이 나에게 어떤 짓을 하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로도 느껴지는 동태와 소리에 나는 그 놈이 나에게 어떤 짓거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예감했고 울면서 "하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 놈은 망설임 없이 매우 급하게 내 웃옷을 올리고 바지를 내리며 또 거친 숨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너... 오늘 일을 누구한테라도 얘기하면 내가 학교 방송시간에 니가 이런 거 다 떠들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



나는 그 순간 내 머리카락이 모두 쭈뼛 서는 거 같았다. 그 놈의 더러운 살갛이 뱀처럼 내 몸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죽어 있는 내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이 하라는 대로 다 해야겠구나. 안 그러면 비참하게 될거야.


무력감과 공포로 눈을 계속 질끈 감고 있었기에 이후 잠깐 동안 그 놈이 뭘 하느라 날 강간하지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사이 학교 화장실 뒤로 있는 낮은 담 너머 2층 집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익 하고 들렸다.


"엄마야, 저게 뭐고"


그 아주머니가 놀라서 뱉은 말이 나를 살렸다. 그 미친 놈은 황급히 옷을 입고 내 옷을 입힌 뒤 "조용히 따라와" 하며 친구와 내가 처음에 있던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쑥대밭이 된 마음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죽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거의 모퉁이를 돌기 직전 이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걸음을 옮기는 그 놈 등에다 대고 소심하게 한 마디 붙였다. 울면서.

"이런 짓 하지마세요. 여자들은 이런 거 정말 싫어해요"


그 놈이 빠른 걸음으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제서야 나는 긴장이 풀려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도저히 그쳐지지 않는 울음이었다. 울음이라기보다 통곡과 오열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있었냐며 걱정하는 친구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벽에 기대 울다가 친구랑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하교길에 늘 지나치던 놀이터며 사거리, 쌀집 등을 지나는데 평소엔 그렇게 아름답고 컬러풀하던 세상이

모두 지직거리는 흑백티비처럼 흐릿하고 어지럽게 느껴졌다. 나는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며 또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면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 엄청 혼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바로 욕실로 갔다.


다행히 엄마는 낮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금새 방으로 들어가 날 보지 못했다. 욕실에서 찬 물로 몇 번이고 내 몸을 씻었다. 더러운 뱀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기에 때수건을 찾아 필사적으로 온몸을 빡빡 문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잠을 자고 학교 생활을 하고 웃고 놀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법정에서 그 소녀를 보기 전까지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