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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Oct 27. 2020

4. 1988년 그 날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 생명과 안전의 문제다


1988년 가을이었다. 적당히 흐리고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조용한 일요일이었다. 당시 초등학생 5학년이었던 나는 웃옷은 하얀색, 아래는 남색인 체육복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 운동회 때 응원단장 역할을 해야 해서 일요일이지만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 연습하기로 했다. 응원연습은 언제나 신나고 재밌는 일이라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낼름 집에서 나와 학교로 향했다.


내가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이미 와 있었고 우리는 어디서 연습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학교에 아무도 없는 일요일이었지만 그땐 학교 정문이 휴일에도 열려있어서 운동장에서 안무연습을 하면 오가는 사람들이 볼까봐 좀 민망할 거 같았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학교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의 사이에 있는 좀 외진 곳, 실외 화장실 근처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핸드폰은 커녕 mp3 도 없던 시절 우리는 생목으로 노래를 불러가며 응원안무를 맞춰 보았고 깔깔 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한참 안무를 짜고 있는데 2~30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다소 큰 아저씨가 코트를 걸치고 성경책을 한 손에 든 채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착한 어린이는 친절해야 하므로 나는 저기 있다고 손가락으로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 쭉 가면 있어요"

그러자 아저씨는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같이 가줄래?"라고 했다. 그냥 가보면 알 텐데 싶었지만 착한 어린이는 친절해야 하므로 나는 아저씨 앞에서 걸으며 친구가 있는 곳에서 점점 멀어졌다. 평소 그 화장실은 푸세식 화장실이라 나는 그 곳에 가는 것을 끔찍히 싫어했지만 내가 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하며 나는 ㄱ자로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 방향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화장실 앞에서였다. 그 놈이 갑자기 나를 학교 건물 벽쪽으로 밀어 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 참 예쁘게 생겼다. 공부도 잘하지?"

뜨겁고 불쾌한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내 얼굴 가까이까지 얼굴을 들이댄 그 놈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 나는 오늘 이 놈한테 이렇게 죽는 거구나'

나는 12살 평생 처음으로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쓰러질 거 같았지만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겠다 싶었다.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용기가 도저히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뜨지 못했다.


단 10분만에, 그것도 이 평온한 일요일에 화장실 알려주는 친절 한 번 베풀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저 내 목을 누르는 그 놈의 손이 끝내 내 목을 조르지 않을까 싶어 그 놈의 손가락을 소심하게 붙잡고 있었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놈이 바지 허리띠의 버클을 푸는지 소리가 찰칵 들렸다.


'아 이거구나'

제대로 된 성교육도 받지 못했던 때라 나는 그 놈이 나에게 어떤 짓을 하려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로도 느껴지는 동태와 소리에 나는 그 놈이 나에게 어떤 짓거리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예감했고 울면서 "하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 놈은 망설임 없이 매우 급하게 내 웃옷을 올리고 바지를 내리며 또 거친 숨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너... 오늘 일을 누구한테라도 얘기하면 내가 학교 방송시간에 니가 이런 거 다 떠들 거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



나는 그 순간 내 머리카락이 모두 쭈뼛 서는 거 같았다. 그 놈의 더러운 살갛이 뱀처럼 내 몸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죽어 있는 내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이 하라는 대로 다 해야겠구나. 안 그러면 비참하게 될거야.


무력감과 공포로 눈을 계속 질끈 감고 있었기에 이후 잠깐 동안 그 놈이 뭘 하느라 날 강간하지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사이 학교 화장실 뒤로 있는 낮은 담 너머 2층 집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끼익 하고 들렸다.


"엄마야, 저게 뭐고"


그 아주머니가 놀라서 뱉은 말이 나를 살렸다. 그 미친 놈은 황급히 옷을 입고 내 옷을 입힌 뒤 "조용히 따라와" 하며 친구와 내가 처음에 있던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쑥대밭이 된 마음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죽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서웠다.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거의 모퉁이를 돌기 직전 이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걸음을 옮기는 그 놈 등에다 대고 소심하게 한 마디 붙였다. 울면서.

"이런 짓 하지마세요. 여자들은 이런 거 정말 싫어해요"


그 놈이 빠른 걸음으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제서야 나는 긴장이 풀려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도저히 그쳐지지 않는 울음이었다. 울음이라기보다 통곡과 오열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 있었냐며 걱정하는 친구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벽에 기대 울다가 친구랑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하교길에 늘 지나치던 놀이터며 사거리, 쌀집 등을 지나는데 평소엔 그렇게 아름답고 컬러풀하던 세상이

모두 지직거리는 흑백티비처럼 흐릿하고 어지럽게 느껴졌다. 나는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며 또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면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 엄청 혼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바로 욕실로 갔다.


다행히 엄마는 낮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금새 방으로 들어가 날 보지 못했다. 욕실에서 찬 물로 몇 번이고 내 몸을 씻었다. 더러운 뱀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기에 때수건을 찾아 필사적으로 온몸을 빡빡 문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잠을 자고 학교 생활을 하고 웃고 놀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법정에서 그 소녀를 보기 전까지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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