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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Oct 26. 2020

2. 마음에게 묻고 또 묻다 보니

마음만 챙기고 혼자 떠난 여행에서


가족들과 함께 미국 여행을 갔을 때였다. 유명한 캐년들의 장엄한 풍경들 앞에 "와"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아 정말 살아 있는 게 행복하구나 환희가 마음에 차오른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그래 다 용서하자"


뱉어진 말이 의아했다. 뭘 누구를 용서하지?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과 남편이 저만치 가고 있었기에 잊고 쫓아가기에 바빴다.


그때 뿐만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아주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면, 괜히 울컥 눈물이 나면서 용서라는 단어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용서라... 그래,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성당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수업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주제가 "용서"였다. 수녀님은 나에게 가장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 말해 보라 했고 나는 약간 흥분하면서 그 인간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갑자기 왜 행복할 때만 용서라는 단어가 떠오를까...


살면서 한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내 마음을 한 걸음에 알 순 없겠지.


혼자 여행을 가서 일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오로지 내 마음만 바라보면서 내 마음 내 느낌 내 생각대로 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매순간 어딜 가고 싶은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소소한 것부터 마음을 관찰하다 보면 나를 조금씩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내 축축한 상처도 조금씩 볕을 쬐고 치유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처음 혼자 간 곳은 독일 뮌헨이었다. 혼자이니 오직 내 마음하고만 대화하면 됐다. 난 인터넷에 나오는 유명한 곳은 그냥 쓱 훑다시피 지나쳐 갔고 사람이 드문 호수나 강가, 쇼핑몰 옆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 같이 한적한 곳에 그냥 앉아 있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가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하늘과 나무가 내 시야의 절반을 차지하는 뻥 뚫린 곳에서 아무 것도 않고 멍하니 있으니 내 마음에 더덕더덕 붙어있던 모든 분노와 고통의 딱지들이 다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그 자리를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를 아는 척하지 않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아무도 챙기지도 배려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아 내가 눈치보는 나에게 지쳤었구나.


그렇게 우주에 나 혼자 있는 기분으로 있으면 밑도 끝도 없이 여러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어릴 때 참 많이도 울었는데 내 양껏 울지는 못했구나.

나는 사랑을 받긴 받았는데 내가 필요로 하는 양만큼, 원하는 방식대로 받지 못했구나.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평가받고 칭찬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해야 하는 것들이나 당위는 직감적으로 바로 아는데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은 잘 모르는구나.

이제 두 아이의 엄마이고 그럴듯한 직업까지 가졌는데도 내 마음을 잘 모르다니.

그래서 내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것,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이 앞서나 보다.

그러다 보니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사람(남편)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화가 났구나.....

화를 내는 반응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 왜 잘 제어가 안 될까

내 딴에는 잘해 주고 있다 생각해도 아이들 마음을 잘 못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끅끅하고 심한 울음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래서 후련히 울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이 나에게 준 또다른 선물은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

독일의, 일본의, 제주의, 대구의 어떤 낯선 거리를 쏘다녀도 내가 밤늦은 시간이나 으슥한 곳만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전하다.


이제 나는 어른이고 아무도 어릴 때처럼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귀엽다며 나를 함부로 만지거나 유인하지 않으며 설사 그런다 해도 나는 거부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다. 나쁜 놈을 만나면 난 당당하게 소리지르거나 도망칠 것이고 기차를 놓치거나 지갑을 잃어버려도 다 해결방법이 있다!!

엄마가 어릴 적 늘 말한 것처럼 "큰일"은 안 일어나.


몇년 동안 서서히 여기도 혼자 가고 저기도 혼자 가보면서 누구도 고려,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내 마음 가는 데로 내 결정권을 마구 휘둘러 보면서 나는 서서히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젠 일상에서도 나는 나 자신에게 수시로 묻는다.

"넌 이 순간 원하는 게 있어?" "싫으면 안 해도 되"

"니 마음 가는 데로 해도 되. 큰일 안 생겨"

"그렇구나 그런 마음이구나"


나에게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한 이후부터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게 좀 더 쉬워졌다.

이후 우리는

 "숙제해" "아직도 안했어?" "저게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라며 얼굴을 찡그리기보다 이렇게 얘기하며 서로 깔깔댄다.


"숙제했어?"

"아니"

"그랬구나 하기 싫음 안해도 되

 단 선생님이 혼내거나 부정적 반응을 보일 수 있긴 해"

"걱정 마쇼. 엄마보다 내가 내 일은 더 알아서 잘해"


이렇게 덜 비난하고 더 있는 그대로 긍정해 주며

난 내가 잘 살고 있다 느끼고 흐뭇하다.


내 마음에 배경음악처럼 흐르던 불안과 걱정, 원망이 많이 줄었다. 인생 별거 없어. 숙제 못하면 좀 혼나면 되고 큰돈 못 벌면 적게 쓰면 되지.


꼭 뭐가 되어서 얼마 이상을 벌어야만 행복할 수 있고 오늘의 공부와 성취를 위해 서로를 돌보는 시간과 웃음, 사랑마저도 희생해야만 미래에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잘못된 인과 공식, 그 강박, 그 때문에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불안이 되어버리는 이 불행한 현실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좀 덜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너무 걱정하지 않고 흐름에 나를 맡기고 가족들과함께 있음 진정으로 행복하고 혼자 있으면 마음이 산뜻하게 홀가분한 그런 삶. 10년의 치유기간 동안 되었다 안 되었다 하지만 분명 그 방향으로 조금씩 더디게 가고 있다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이 말했다.

"전에도 일깨워줬는데 너 자꾸 외면하고 있는 게 있잖아.

 그걸 계속 외면한 채 껴안고 있음 눈물은 자꾸 날 거야.

이제 준비가 됐어. 그 아이 만나러 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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