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와 방어기제
내 마음이 그날 명료하게 그렇게 말했다. 이제 그 아이를 만날 때라고,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고.
그런 마음을 느낀 건 이불 속에서 남편과 내일 갈 상담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나: "자기야 나 이상하게 내일 상담 가기가 무섭네"
남편 : "진짜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랑 언제 상담을 받아보겠어, 이럴때 자기도 다 털어놓고 치유하면 좋지 않을까?"
나 : "난 혼자 책보고 여행다니며 거의 다 치유된 거 같아.. 할말도 별로 없을 거 같은데"
남편 : "근데 자기야 자기 그거 알아? 나한테도 그 어릴 때 얘기 자세히는 안했어...세밀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건 아직 힘들단 의미일 텐데..."
나 : ".........."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12살에 그 일이 있고 20년 동안 아무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그 아이가 도저히 이렇겐 살 수 없다고 지하창고를 뚫고 탈출했다. 그래 내가 왜 말을 못해야 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 아우성에 난 아무일 없었던 일처럼 스스로를 억압했던 무의식을 잠깐 걷어냈고 그 무렵 만나는 사람마다 나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어 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 와중에도 아주 자세한 얘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이불 속에서 다시 그 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억울함과 슬픔 세포가 되살아나 온몸에 퍼지며 대상포진을 앓았던 허리쪽은 찌리릭, 눈물은 주르륵...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거 같다. 이래서 떠올리기 정말 싫다.
다음날 상담시간은 오후 네시였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르는 게 인식되고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자꾸 배가 아팠다. 토할 거 같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상담하러 가기가 너무 싫었다. 오늘 못간다고 할까. 몇번을 망설였지만 결국 상담실.
예상과 달리 앉자마자 얘기를 쏟아냈다. 눈물도 같이 쏟아졌다. 또다시 억울함과 슬픔이 겨울공기처럼 차갑게 내 맨살을 짓눌렀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사실은 제가 반 밖에 말을 안했어요"
이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에서는 '뭐지? 뭘 반 밖에 말을 안 했다는 거지? 거짓말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다시 울음이 터져나오며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사건에서 내가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말 싫었던 게 그 인간의 그 곳이 저한테 닿았던 감촉이에요. 그 순간 뱀이 제 몸을 감싸는 듯 말할 수 없이 징그럽고 숨이 턱 막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제서야 알 것 같고 땅바닥에 비참하게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죽어 있는 몇 분 뒤의 제가 상상되고 그렇게 안 되려면 그 사람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야 할 거 같고..."
나는 전날 밤에도 떠올리지 못했고 지난 30년 넘게 완전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던 얘기를 내 의식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오열하면서 토해내고 있었다.
놀랍고도 슬픈 경험이었다. 얼마나 그 감각이 견디기 힘들었으면 의식 저 뒤편으로 그렇게까지 억압해 놓았을까.
열두살의 그 아이는 누더기가 된 옷을 겨우 걸치고 그렇게 의식 저 뒤편 컴컴한 지하창고에소 탈출해 다시 내 앞에 있었다.
'너를 인정하지도 충분히 안아주지 못했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 같아서 도저히 너를 드러낼 수가 없었어.
그냥 지하 300층 정도 되는 창고에 너를 가두고 자물쇠를 철컥철컥 잠그면 나는 너를 잊고 아무렇지 않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어른이 된 내가 너를 돌보지 않은 건, 니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너를 지하로 밀어버리고 가둬버리고 한 건 큰 잘못이었던 거 같아.
내가 어른이 덜 되어서 그랬나 봐. 다른 피해자들을 도와주면서 너를 마주하면 내가 무너질 것만 같았나 봐.
너를 마주하는 게 너무 겁이 났어. 이제는 그러지 않을께. 이젠 정말로 내가 너를 안아줄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