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꽃에 대하여
한 달에 한두 번 꽃을 선물 받는다. 꽃들의 이름과 함께 간단한 설명이 적힌 카드가 박스에 동봉되어 있다. 리시안셔스, 다알리아 같이 대부분 생소한 이름이라 금방 잊어먹는다. 며칠 전엔 용담초가 현관 앞에 놓여있었다. 용담은 개화과정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봉오리의 컬러감을 주로 즐기는 꽃이라고 한다. 절단된 용담초의 꽃망울을 물에 담가 놓는다고 해서 쉽게 개화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튼 난 이제 조금은 능숙하게 꽃을 고정시키기 위해 박스에 체결된 케이블 타이를 제거한다. 그리고 가지에 달린 잎사귀를 뜯어낸다. 잎이 많을수록 꽃에게 돌아가는 양분의 몫이 줄어드는 게 자연의 이치라는 걸, 나는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원예용 가위로 가지를 비스듬히 자른다. 경우에 따라 키를 맞춘다. 화분을 깨끗하게 씻고, 찬물에 얼음을 몇 덩이 떨군다. 그리고 꽃을 꽂는다.
사실 이 선물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한 것이다. 꽃 배달 플랫폼에 정기 구독을 하고 있다. 휴대폰 알람을 대부분 꺼놓는 습관 탓에 매달 구독료가 결제되는 걸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돈이 나가는지도, 꽃이 언제 오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 슬슬 오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문 앞에 기다란 택배 상자가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이 생소한 이름표를 단 채로 문 앞에 놓여있다. 생일 선물을 받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대충 언제쯤 받을지를 알고 있지만, 무엇을 받을지는 정확히 모른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명백히 후자다. 내 생일이라고 해서 현관문 앞에 서로 다른 크기의 택배 상자가 쌓여있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별로 챙기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낫냐는 질문은 역시 무용하다. 사람마다 다른 건데, 보통 나고 자란 환경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가족끼리 생일 선물을 챙기는 게 당연한 집들이 있다. 서로에게 필요했던 가전이나 제법 값이 나가는 옷, 신발 같은 걸 선물한다. 우리 집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난 누군가의 생일, 혹은 의미가 있는 날짜에 적절한 선물을 고르는 게 어렵다. 그래서 잘 안 한다. 물론 그게 내가 돈을 벌면서도 부모님께 그럴듯한 선물 한번 해드리지 않은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겠지만.
애인이 있을 땐 물론 선물에 신경을 쓴다. 그 사람이 지나가면서 예쁘다고 했던 물건이나, 좋아하는 브랜드를 기억해 두었다가 선물한다. 딱히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솔직하게 물어본다. 그때의 반응도 사람마다 참 다른데, 상당히 서운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외려 넘겨짚지 않고 물어봐 준 걸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다. 꽃들의 생김새나 생육이 모두 다른 것처럼.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어쨌거나 꽃은 진다. 잘 살아 있던 걸 인간이 억지로 꺾어온 것이니 당연하다. 매일 밤 화병의 물을 갈아주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보통 일주일을 못 간다. 점점 시들고 말라가는 꽃을 나는 왜인지 버리지 못한다. 거의 썩을 때까지, 어쩔 때는 줄기 밑동에 하얀 곰팡이 비슷한 것이 필 때까지 붙잡는다. 결국 더 이상 한 공간에 있기 어려워진 꽃을 봉지에 담아 오피스텔 지하 2층 분리수거장에 가서 버린다. 그때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스스로에게 무언갈 선물하고 금방 버린다. 이 비일상성이 서로 지근거리인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나의 일상을 지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