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과 여유

"비를 맞고 난 춤을 춰"

해가 쨍쨍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저 앞에 먹구름 뭐야? 무섭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내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비바람이 불었다. 우비 입을 시간도 없이 머리끝부터 가방, 신발 속까지 홀딱 젖어 버렸다. 짜증을 낼 법한데도 신이 났다. 마침 더웠던 참이었는데 시원했다. 기분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덕분에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쉴 수 있게 됐다. 신기하게도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해가 쨍쨍하게 떴다. 해가 뜨면 해가 뜬 대로 마냥 좋았다.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내 하루가 좋았다.


한국에서, 순례길을 막 걷기 시작했을 때는 여유가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 곧 할 일, 그 때문에 내 마음을 다독일 시간이 없어서 날이 궂은 날도 걷고 아파도 걸었다. 절반 정도 걸었다고 이젠 여유가 좀 생겼나 보다.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경험들이 쌓였다. 덕분에 비바람을 맞아도 빨래 걱정보다 지금 더운 열기가 식어서 행복했다. 어차피 빨래는 비가 오나 안 오나 해야 할 일이었고, 비바람도 지금 이 길 위의 나를 지나가야 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오늘처럼 할 수 있을까? 지옥철을 타면서 웃을 수 있을까? 아직은 걱정이라는 감정을 다 떨쳐내기는 어렵다. 남은 순례길에선 지겹도록 나를 다독이고 싶다. 마음껏 여유를 즐기게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