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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베트남에서 온 <미나리 소녀>

<<Bèo dạt mây trôi 구름의 노래>>

by 그래놀라

2-1화. 베트남에서 온 <미나리 소녀>


청심동 언덕마을, 그곳에서 루아는 누구보다 먼저 새벽을 열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빛은 아직 옅었지만, 언덕 위 옥탑방은 도시보다 조금 더 일찍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허리부터 두드렸다. 전날 쌓인 피로가 눈꺼풀을, 어깨를, 골반을 누르고 있었다.


"루아, 홈 나이 꿍 꼬 롄 녜!"


거울을 보며 베트남어로 말했다. 그리고 한국어로 덧붙였다.

"파이팅! 점장님."


팔봉집 청심동 분점, 그곳에서 루아는 이름 대신 "점장님"으로 불렸다. 하지만 진짜 대장은 주방에 있었고, 루아는 서빙부터 카운터, 전화, 설거지까지 가게일 전부를 맡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없었다. 팔봉집 사장은 "잘 부탁한다~" 한마디만 남기고 매일아침 본점으로 사라졌다.

이 조그마한 베트남에서 온 소녀가 얼마나 야무지고 똑똑한지를 사장은 지난 2년간 지켜봤다.

한국 청년들은 일주일도 못 버티고 관두는 삼겹살 집 홀서빙을 루아는 그동안 결근 한번 없이 묵묵히 해냈다.


쉬는 시간도 놀지 않고 가게를 쓸고 닦는 모습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는 루아가 돈을 더 벌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직원 서넛보다 낫다며 치켜세우더니, 결국 인센티브제로 분점을 통째로 루아에게 맡겼다. 루아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해외에서 누군가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건, 외국인 노동자에겐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루아는 베트남 명문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에 왔다. 3남 2녀 중 둘째, 막내 남동생이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버티자 다짐했다.

매달 백만 원씩 고향에 송금했고, '2년만 참자. 집을 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악착같이 일했고 벌어서 모았다.


그러나 고생은 2년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정직원이 되어 취업 비자를 연장하고 한국에 눌러앉았다.


가게 문을 열기 전, 루아는 진통제 한 알과 카페인 음료를 털어 넣었다. 손이 떨릴 때가 있었다.

언젠가 혼자 주방에 앉아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엄마의 전화가 왔다.


"루아,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지?"


"엄마, 여긴 내 식당이야. 고기도 반찬도 내 맘대로 먹어. 걱정 마."

실은 먹을 시간도 앉을 시간도 없었다.


늦은 밤 퇴근을 서두르던 루아는 가게 앞 쓰레기봉투를 정리하느라 기름 묻은 장갑을 낀 채로 언덕을 올라, 옥탑방에 도착했다. 평상 옆에는 누군가가 먼저 와 있었다. 서울에 와서 힘든 날 빨리 퇴근해서 보고 싶은 존재.

어둠 속, 검은 실루엣.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루아를 반겨주는 이는 동네 길 고양이, 청심이었다.

그녀는 평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청심아... 나 가끔 네가 부러워. 어디에도 붙잡혀있지 않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나는 하루 종일 가게에만 갇혀 있는데"


청심이는 루아의 다리를 살금살금 타고 올랐다. 그리고 작은 앞발로 그녀의 무릎을 살짝, 위로하듯 두드렸다.


서울의 밤은 조용했고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별이 하나 둘 피어나는 걸 보면서도 몰랐다. 이 작은 골목의 옥탑방에서의 시작이 그들의 세계가 된다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점심 무렵, 오늘도 필봉집은 부대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루아는 서빙 쟁반을 들고 정신없이 테이블 사이를 오갔다. 그날따라 눈에 띄는 손님이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늘 혼자 왔고, 오늘도 휴대폰을 뒤적이며 대충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그는 근처 J대학교 전기전자과 3학년, 부산에서 올라와 청심역 근처 고급 셰어 하우스에서 사는, 가끔 팔봉집에서 혼밥을 때우던 서준이었다.


"여기 주문이요. 부대찌개 하나요~"


루아는 끄덕이며 주문을 받았다.

서준은 그날따라 엄마가 아침에 보내온 톡이 떠올랐다.

"서준아~봄 찌개엔 제철 미나리라도 넣어야 제대로 묵는 거다. 알겠지?"


서준은 메뉴판을 내려놓고 덧붙였다.

"혹시... 미나리 좀 넣어 주실 수 있어요?"


잠시 멈칫하던 루아가 말했다.

"보통은 부대찌개에 미나리는 안 넣어요. 햄이랑은 콩나물이 더 잘 어울리거든요."


서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오늘은 미나리가 먹고 싶어서요."


"부대찌개엔 콩나물이 공식인데, 원하시면 미나리로 넣어 드릴게요."


그 짧은 말투, 단단한 어조. 루아의 말은 서울 사람들보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들렸다.


'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네... 씩씩하고 멋지다.'


식사를 한 후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며 또 생각이 스쳤다.

'저 누나는 여기 어떻게 왔을까? 똑똑해 보이는데...

근데...

난 왜 미나리를 달라고 했을까..."

머리를 긁적이며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그 밤, 부대찌개와 어울리지 않던 미나리처럼 서준의 머릿속엔 그 외국인 그녀가 자꾸만 떠올랐다.

조용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말투가, 고양이처럼 조용히 그의 머릿속을 걸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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