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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세 친구

<<Bèo dạt mây trôi 구름의 노래>>

by 그래놀라

2-3화. 세 친구


봄이 되자 청심동 언덕에도 햇살이 길게 머물렀다.

주민센터 앞 벤치에는 익숙한 고양이 청심이가 나른하게 몸을 말고 있었고, 그 옆으로 배낭을 멘 대학 새내기 같은 한 여학생이 고양이 간식을 들고 지나다녔다.

청심동으로 이사 온 희수의 딸이자, J대학교 1학년 서양화과, 은서였다.


언제나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커서도 여전히 연필을 들고 있었다. 은서는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 드로잉 수업 자료로 쓸 스케치 사진을 찍으며 새 동네를 누볐다. 골목골목을 걸으며 여태 본 적 없는 풍경에 감탄을 터뜨렸다.


“노노 노스텔지아... 아아, 아날로그... 그 그, 그레이스... 스스, 스타일... 와~ 미쳤다.”

젖이 불은 어미 고양이도, 골목에 쓰러져 있는 뜯어진 쓰레기봉투도, 금 간 담벼락에 소심하게 그려진 낙서도, 시간이 과거에 머문 듯 보였다. 그리고 동네 뒤로는 DDP를 비롯한 뉴타운들이 즐비하게 들어와 있었다.


마치 시간의 역순이 한 장의 필름 안에 겹쳐진 듯한 광경이었다.


골목의 좁고 가파른 계단 한쪽에 담벼락이 기울어진 작은 집이 있었다. 담벼락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는데,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런닝 차림의 할아버지가 옛날 아날로그 TV를 켜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은서가 카메라를 들자, 할아버지가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에헷!” 하며 쪽문을 ‘쾅’ 닫았다.


은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휴... 조심해야겠다. 집안이 다 보이네.’


잠시 후, 마당 쪽에서 할아버지가 빨래를 걷으러 나왔다.

골목보다 집 안채가 한참 낮아, 또 눈이 마주쳤다.

휘리릭 빨래를 걷던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좋다고 그걸 연신 찍어 대... 요즘 것들, 하루라도 여기 살아보라지! 에잇, 철딱서니들.”


쾅! 다시 문이 닫혔다. 은서는 멈칫했다. 그제야 골목의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사진을 찍는 건 자신뿐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인생샷’을 건지러 온 이방인들이 골목마다 있었다.


‘아... 여기 사는 분들껜, 이게 민폐일 수도 있겠다.’


은서는 카메라를 천천히 내렸다.

‘언젠가, 이 불편한 감정들마저, 잊히지 않게 그림으로 담아야겠다.’

그 마음을, 조용히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며칠 후, 학과 건물 앞에서 은서는 동아리 선배 서준을 마주쳤다.

“어, 선배~ 팔봉집 단골이죠?”


서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저, 그 건물 주상복합 살아요. 지나갈 때마다 선배 그 집에서 혼밥 하는 거 봤어요.”


“야~ 보이면 좀 들어와. 혼밥도 이제 지겹다.”


며칠 뒤, 팔봉집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또 혼밥 해요?”


서준이 가게 안쪽에서 고개를 들었다. 밝은 인사에 주방에 있던 루아가 나왔다.

“어, 은서야. 여기 루아 씨랑 인사해. 내 친구.”


“아... 혹시 기억 안 나시죠? 우리 가족 이삿날부터 며칠간 여기서 계속 점심 먹었는데, 저는 민은서라고 해요. 이 위층 아파트에 살아요. 서준 선배 동아리 후배예요.”


은서는 투명테 안경을 쓴 또렷한 인상의 대학생이었다. 루아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은서는 어색하지 않게 자리에 함께 앉았다.


그날 이후 셋은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은서는 청심이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루아와도 가까워졌고, 서준은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부산 사투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조금 더 말이 많아졌다.



옥탑방 평상 위에 맥주캔 세 개가 놓이고, 고양이 청심이가 루아의 무릎 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여기 진짜 분위기 좋다.” 은서는 신이 나서 말했다.

“옥상에 별도 보이고, 뭔가 영화 속 장면처럼... 이런 아름다운 장면에 내가 서 있다니 꿈같아요.”


서준이 캔맥주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공대생, 외국인 노동자, 미대생. 이 조합 뭔데?”


“아니죠, 선배~ 한국 백수, 진짜 일꾼 외국인 청년, 그리고 백수 후배. 그렇게 삼총사죠.”

셋은 동시에 웃었다.


“우린 겉만 번지르르하고, 루아 언니 보면 진짜 정신 번쩍 들어요.”

셋은 나란히 서서 청심동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루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우리가 친구라는 게 좋네요. 바람도 불빛도 이제 낯설지 않아요."


도시의 불빛은 바람에 번진 물감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섞이며 셋의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겼다.


그 순간, 서로 다른 세 갈래 길이 한 곳에서 잠시 만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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