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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감자 먹는 사람들

<<Bèo dạt mây trôi 구름의 노래>>

by 그래놀라

2-5화. 감자 먹는 사람들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여름, 루아의 옥탑방엔 선풍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연 작은 방에 셋이 앉아 있었다.

루아는 외국인 편입학 원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서준은 바닥에 누워 노트북으로 음악 작업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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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노트북을 덮고 일어나 편입학 요강을 다시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항목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에요. 이 항목 보면 GPA랑 한국어능력시험 성적 넣을 수 있어요. 근데 루아는 한국어 너무 잘해서 교수님들이 더 놀라실 것 같은데...”


루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이게 진짜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왜요? 루아~ 그때 말했잖아요. 2년 뒤엔 돌아가서 집 사고, 공부 다시 시작할 거라고. 돌아가진 않지만 여기서 다시 공부하는 거잖아요.”


루아는 열린 문밖으로 동네를 바라봤다.

“응. 그게... 나중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여기에, 정이 들었나 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엄마 의지로 예고 나오고 입시 미술만 하다가 그냥 대학생이 됐는데, 여기 와서 좀 달라졌어요."


"언니가 어려운 상황에도 포기 안 하고 자기 길 찾아가는 거 보면서,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많이 생각했거든요. 나한테 그림은 대학 가려고 억지로 한 거였는데, 그리고 싶은 게 생기니까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게 좋아졌어요. 이 동네, 사람 이야기요.”


루아가 고개를 돌렸다.

“와 좋아요! 그 얘기 중에... 나도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럼요! 언니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뮤즈이자 메인 캐릭터예요.”


셋은 함께 웃었다.

루아는 서준의 노트북으로 편입학 지원서를 제출했고, 엔터키를 누르자 셋은 동시에 박수를 쳤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진 몰랐지만, 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은서는 집 밖으로 나왔다.

큰 카메라 대신 휴대폰을 들고, 골목을 슬쩍슬쩍 담았다. 동네를 찍는 것이 주민들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통화하는 척, 영상을 보는 척하며 틈틈이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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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두는 노인들, 아기를 업고 언덕을 오르는 엄마, 길고양이처럼 풀썩 누운 개까지…

더운 날씨에 축 처진 개에게 물을 부어주며 은서는 중얼거렸다.


“다음엔 종이컵이라도 챙겨야겠다.”


그러다, 한 할머니가 벤치에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꽃무늬 몸빼바지에 강렬한 색의 상의, 앞에 놓인 폐지 수레까지... 그 조합이 묘하게 예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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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그림 구도만 생각하며 몰래 사진을 찍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다가가 살짝 몸을 흔들었다. 숨소리와 미동이 없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깊은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여기 오래 누워 있었나?”


“네... 날씨가 너무 더워서요. 물 좀 드세요.”


은서는 생수를 건네고, 목에 걸고 있던 미니 선풍기를 할머니 쪽으로 돌렸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앞에 놓인 수레를 가리켰다.


“이거 좀만 밀어줄 수 있을까?”


“네, 할머니. 제가 끌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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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언덕 위로 오르는 길,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밤마다 팔봉집에 들러 루아와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 외국처자 참 착하다니께. 이 동네 와서 금방 잘 어울려.”


“맞아요,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해가 진 저녁, 은서는 오후에 만났던 할머니의 말이 궁금해져 팔봉집에 들렀다. 마침 루아와 할머니가 마주 앉자 삶은 감자를 나누고 있었다. 주황빛 전구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이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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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웃음과 말없는 위로가 오가는 그 장면이, 은서의 마음속 깊이 뭉클하게 내려앉았다.


“중동 근로자였던 외할아버지도... 저 먼 나라에서 이런 식탁에 앉아 있었겠지. 그땐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였고, 이제는 그 자리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 있네….”


집으로 돌아온 은서는 캔버스를 꺼냈다. 붓을 들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게... 내가 그릴 ‘오늘의 한국’이구나.”


어둠 속에서 비록 희미할지라도 드러나는 빛, 가장 약한 존재에게 손을 내민 건 또 다른 약한 존재였다.

그 장면 위로 좋아하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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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오늘 본 그 순간을,

반드시 그림으로 남기겠다고 마음속 깊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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