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èo dạt mây trôi 구름의 노래>>
2-2화. 옥탑방 피아노
그날은 유난히 손님이 많았고, 배달도 밀려 정신없는 하루였다. 루아는 가게 쓰레기를 정리하며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던 루아의 걸음이 분리수거장 앞에서 멈췄다.
폐기 스티커가 붙은 하얀색 디지털 피아노.
먼지가 쌓였고, 아래쪽엔 어린이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외관은 멀쩡했고, 키 몇 개는 누군가 눌러본 듯 반짝였다.
루아는 그 앞에 섰다. 가볍게 건반에 손을 올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녀 마음속엔 분명히 소리가 들렸다.
손끝에서 번지는 멜로디는 마치 오래전 고향에서 들었던 베트남 민요처럼, 조용히 그리고 깊게 울렸다.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이거... 버리시는 거예요?”
서준이었다.
야식거리를 사러 나온 듯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루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버린 것 같아요. 그냥 보고 있었어요.”
“아깝네요. 거의 새 거 같은데.”
“소리도 안 나요.”
“이거 디지털이니까... 제가 바로 여기 뒤쪽에 사는데, 한 번 들고 가서 작동되는지 볼까요?”
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눈망울이었다.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서준은 셰어하우스 자취방으로 디지털 피아노를 옮겼다. 전원을 꽂고,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맑고 선명한 음이 울렸다.
“살아 있었네.”
그는 팔봉집으로 다시 달려갔다.
“피아노요, 잘 돼요. 소리 정말 예뻐요.”
루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져다 드릴게요.”
“... 언덕이 가팔라서 혼자 들고 가기 좀... 아! 봉자 할머니가 곧 식사하러 오실 거예요. 수레를 빌릴 수 있어요.”
팔봉집은 문 닫을 무렵이면 동네 폐지를 줍는 봉자 할머니에게 무료 식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손님이 빠진 시간에 와서 조용히 식사를 하거나, 남은 반찬을 챙겨 가곤 했다. 가끔은 루아와 나란히 앉아 늦은 저녁식사 함께 하기도 했다.
봉자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 저 오늘 수레 좀 빌려주세요. 피아노 좀 싣고 가려고요.”
“응, 시방 이 총각이 뭣 좀 도와주러 왔는가 봐?”
“누가 디지털 피아노 버렸는데, 소리도 잘 나고... 집에 갖다 놓으려고요.”
“그러면, 이 짝 총각이 저짝 언덕까지 실어다 주겠다 그 말이지?”
봉자 할머니는 서준을 아래위로 훑더니 슬쩍 웃었다.
“네... 제가 옮겨다 드릴게요.”
서준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서준은 할머니 집까지 따라가 폐지를 내려드리고 수레를 빌려왔다.
숨이 턱 막히는 언덕을 처음 올랐다.
“할머니, 이거 무거운 걸 왜 끌고 올라가세요? 아래서 다 팔고 오시지.”
“요즘은 동네 고물상이 다 없어졌어. 일주일에 한 번씩 용달이 집까지 와서 가져가거든. 마당에 쌓아놓으면 와서 실어가. 이젠 노인네도 시대를 따르지.”
서준은 허름한 담벼락과 너풀대는 이불 빨래, 종이박스를 묶는 노인의 손을 바라보며 자신이 살던 청심동 셰어하우스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느꼈다.
“자넨 청심동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전 부산에서 왔어요. 학교가 이 근처라 여기 살아요.”
“아~ 거기 새로 지은 빌라들 많은 쪽?”
“네.”
“이 폐지로는 한 달에 십몇 만 원 정도 들어온다네. 이게 무너질 것 같은 집이라도, 내 땅에 내 집이여...
그래서 나라 지원도 못 받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알아서 도와주는 거지. 팔봉집 사장도 이 동네 토박이여. 젊어서 시장서 같이 장사하던 형님 아들인데,
그 집에서 내 끼니를 챙겨주고, 루아가 또 살뜰하게 나를 챙겨줘.
남은 음식만 챙겨달라 해도, 꼭 같이 먹자고 손 잡고 앉혀.
자기도 고향 할미 생각난다 하면서.
그래서 일부러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거기 들러 같이 밥 먹는 거야.”
“아~ 그러셨구나. 이 동네 참 정이 있네요.”
“그렇지... 여기는 이제 없어질텐게... 마지막 남은 '정'이겠지."
"루아가 참 이뻐. 똑똑하고, 인사도 바르고... 요즘 그런 처자 드물어. 그 애, 베트남서 대학 다니다 말고 온 거야. 객지서 그 어린것이 고생하는 거 보면 짠하지. 그래도 복이 있응게, 이런 좋은 인연도 만나는 거지.”
할머니는 서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맙네, 젊은이. 어여 가서 그거 실어다 줘, 어여.”
서준은 빈 수레를 끌고 내려오며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같은 서울인데, 이토록 다른 세상이 있다니!’
다시 내려와서 수레 위에 디지털 피아노를 실은 뒤, 루아와 함께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밤공기 사이로 둘은 어색한 듯 말없이 웃었다.
루아의 집은 언덕 중턱, 다가구의 꼭대기 옥탑방이었다. 집옆으로 붙어있는 가파른 철제계단을 따라,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피아노를 끌어올렸다.
흰색 디지털 피아노는 루아의 옥탑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벽지의 연한 푸른빛과 잘 어우러졌다. 건반 뚜껑을 여니 먼지 냄새와 함께 고향의 감각이 밀려왔다.
서준은 전원을 연결하고 마지막 키를 눌렀다.
“짠. 여기서 다시 살아났네요.”
“고마워요. 진짜.”
둘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서준이 짧게 코드를 잡았고, 루아는 베트남 민요의 멜로디를 더듬듯 따라 쳤다.
“이 노래, 뭐예요?”
“옛날에 엄마가 자주 불러주던 노래예요.
‘Bèo dạt mây trôi (구름의 노래)’인데, 블랙핑크도 하노이 공연에서 불렀어요.”
“베트남 민요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우리나라 ‘아리랑’처럼 마음이 울컥하네요.”
“엄마는 이 노래 부르실 때 꼭 눈을 감으셨어요. 멀리 떠나는 사람한테 부르는 노래래요.”
서준은 멜로디를 따라 누르며 말했다.
“지금 이 밤이 나중에 어떻게 떠오를까요? 오늘은 선물 같은 하루네요.”
“모르죠... 이 노래처럼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피아노를 쳤다. 서툴지만 정직한 음들이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둘은 맥주 두 캔을 들고 옥상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은 빨랫줄 사이를 지나가고, 도시의 불빛은 멀리 깔려 있었다.
“첫 합주 기념.”
서준이 캔을 건넸다.
“건배.”
루아가 웃으며 받았다.
한 모금 마신 뒤, 둘은 난간에 기대 야경을 바라봤다.
“나는요, 한국 사람하고 이렇게 길게 얘기해 본 건 처음이에요. 그냥... 일만 하러 온 거니까요. 누가 제 얘기에 관심 가질 거라 생각 안 했거든요. 고양이 청심이 말고는, 저한테 말 걸어준 존재가 없었어요.”
“저 고양이, 사람 보는 눈 있어요. 저한텐 눈길 한번 안 주고 무시하던데요?”
서준이 웃었다.
“근데 루아 씨, 한국말 진짜 잘해요. 저보다 나아요.”
“제가요? 그래도 한국말은 한국사람이 더 잘하겠죠.”
“사투리 때문인지 아직도 말 꺼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학교 친구들이랑도 늘 스펙, 시험, 취업 얘기뿐이에요.
근데 다 마음속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별 말 안 하고 살게 되니까... 여기 서울말이 안 늘더라고요.”
루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야 하고 살지만... 저도 그냥 베트남도, 한국도 아닌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언어는 통해도 마음은 안 통하는 느낌? 그냥 일하기 위한 말들만 하게 되니까요.”
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냥 좋네요.”
루아도 고개를 들었다.
별빛이 반짝였다.
그날 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어깨너머로 청심동의 고요한 바람이 지나갔다.
서로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말이 없어도, 침묵의 쉼표조차 마음에 닿는 밤이었다.